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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십 몇 년이 지나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책 자체는 97년 판인데 늦어도 98년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창원에 있을 때 서울 올라오는 기차에서 읽으려고 마산역 근처의 서점에서 사서, 기차로 오가며 이틀 만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죠. 책이 가진 여러 미덕 중에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는데 사실 재미있는 책을 찾기도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책 자체도 재미있어야 되겠지만 읽는 사람과도 Code가 맞아야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이니까요. 아무튼 당시에는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그래도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읽으려니 절반은 새 책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이야기와 인물들만 기억 속에 뿌옇게 남아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의 추억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노르웨이의 숲”은 여타 하루키의 소설과는 형식이나 스타일에서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는 소설입니다. 전으로도 그렇고 후로도 이와 비슷한 작품을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1Q84”에서는 전작 대비 다소 느슨해진 측면이 있지만 하루키 소설에 일관되게 형성되는 구도는 현실과 이에 대비되는 초현실적인 다른 차원의 양분된 세계의 모습인데 이러한 구도를 통해 혹은 잠재의식에 내재된 갈등을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 사건을 조망하기도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사실 이런 묘사에 당황하기도 하는데 심한 경우는 황당무계하다는 반응도 본 적이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사실 이런 식의 초현실적이라던지 사이킥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다소 하루키의 소설로는 의외라고 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좋게 표현하면 개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도 이분화된 세계의 구조를 가지고는 있습니다. “마의 산”을 연상시키는 나오코의 요양소는 역에 내려 시골버스로 한참을 들어가 걷기를 한참인, 그렇게 세상과 너무나도 단절되어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실과 대비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소라는 점을 보면 말이죠.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어찌되었든 스타일리쉬한 글 쓰기라기보다 스토리텔링에 더 무게 중심이 가 있는 소설입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 그리고 미도리 세 명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이를 좁히고 어떻게 아프고 사랑하는지가 이 소설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너무도 압도적인 감정이어서 항상 기쁨의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새삼 되뇌이게 되더군요. 대부분 책을 읽다보면 같은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예전 아픔과 추억이 투영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은 여기서처럼 죽음으로 헤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더라도 오해로도, 변심으로도, 나약함으로도, 비겁함으로도 아니면 시기의 모습으로도 상실되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 안했던 것과 내가 막으려해도 막을 수 없는 것들로 좌절하고 힘들어하던 그러면서도 그녀를 보면 마음이 설레는,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게 옛 친구의 사랑 이야기처럼 다시 읽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