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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4.05.31 노자도덕경 49장 2
  5. 2024.05.20 노자도덕경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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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4.02.21 노자도덕경 44장 2
  9. 2024.01.09 노자도덕경 43장
  10. 2023.12.04 노자도덕경 42장 2

노자도덕경 52장

2024. 12. 9. 13:17 from BoOk/pHiLoSoPhY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기득기모 이지기자 기지기자 복수기모 몰신불태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새기태 패기문 종신부근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見小曰明 守柔曰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 만물은 모두 그 시작이 있으니, 이를 가리켜 천하 만물의 어미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모든 것에는 시초가 있기 마련입니다. 몇 번 비유로 이야기를 했지만 숫자라는 개념이 생겨났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공식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듯 말이죠.  때문에 여기서 시작이라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는 의미보다는 시초 즉 근원이나 근본이 되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이미 그 어미를 알고 있다면 그 자식을 알 수 있고, 그 자식을 알고 있다면 그 어미를 도탑게 지킬 수 있다. (이로서)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게 된다.”

 

근본이 정립되면 그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역으로 이렇게 파생된 새로운 결과물을 통해서 그 모태를 한층 더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서 그런 것은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보죠. 기존의 제품을 조합하던지 해서 신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를테면 세탁기와 건조기를 합친다던지 하는 식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신제품에서 내가 기존 제품을 만들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Idea를 얻어서 기존 제품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거죠.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그 바탕을 지키고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아낸다면 종신토록 동요함이 없을 것이다.”

 

兌라는 단어는 주역에서의 兌卦 (태괘)를 가르킨 것으로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태괘는 ☱로 표현되며, 연못을 상징합니다. 앞장에서 계곡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왔었는데, 여기서 태괘 또한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앞 구절의 母라는 단어와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앞 구절에서 母, 즉 어미라는 단어가 모태가 되는 무언가를 가르킨다면 이 모태는 훗날 파생되어 생성되는 모든 것으로 바탕이 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태를 지킨다는 것은 어떠한 파생품을 만들어내더라도 기본이 되는 핵심 가치는 보존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탕이 된다면 시류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된다는 거죠.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그 바탕을 열어놓고 일을 더한다면 종신토록 구함이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와 대치되는 설명입니다.

 

기본이 되는 가치에 대한 변경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런 위에 무언가를 더한다면 의미있는 성과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내용은 결국 그것이 조직이 되었건, 제도가 되었건 아니면 제품이 되었건 정말 핵심이 되는 가치는 쉽게 바꿔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눈 앞의 성과에만 급급해서 다른 경쟁자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우리의 현실에 대한 고민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그냥 Copy만 하게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도덕경에서는 이를 경계해야된다 말하고 있습니다.

 

見小曰明 守柔曰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작은 것을 살핌을 밝힘이라 한다. 약한 것을 지킴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써서 돌아가 그를 밝히면 재앙이 몸에 남지않게 될 것이니 이런 과정을 학습을 지속하는 것이라 한다.”

 

앞에서 모태와 파생품 간의 선순환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구를 읽어야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정체되는 것도 없습니다.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놓친 것이 없는지 살펴야하고, 그리고 새롭게 알아낸 것을 활용하여 그 전부터 우리의 약점이었던 것을 강하게 하려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用其光 復歸其明이라는 문구는 결국 모태와 파생품 간의 선순환적인 상호 보완 과정을 통해 어둠에 묻혀있던 약점을 다시 돌아가 강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가 잘 진행된다면 위험이 닥치지않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결국 개선점을 지속적으로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習常 즉 항상 배우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대단한 성과물도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방안이 나와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고 배움을 지속해야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51장

2024. 10. 16. 16:38 from BoOk/pHiLoSoPhY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도생지 덕축지 물형지 세성지

是以萬物莫不存道而貴德

시이만물막부존도이귀덕

道之尊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도지존덕지귀 부막지명이상자연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도도생지 덕축지 장지육지 정지독지 양지복지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是謂元德

시위원덕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도를 통해 무언가 만들어진다면 덕을 통해 이것이 길러지게 된다, 주위의 자원을 활용하여 형태를 갖추게 되면 기세를 얻어 성장하게 된다.”

 

앞 장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면 “생성-성장-안정-소멸”의 생애 4단계를 거치게됩니다.

 

51장의 첫 문장도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道와 德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새로운 法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기존의 입법 절차 즉 道에 의해서 만들어지게됩니다. (道生之) 그러면 단순이 입법절차만을 따르면 좋은 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여기서 德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마주하고 있는 문제나 이슈를 해결하고 구성원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주어지는 방안을 고민하는 德이 바탕이 될 때 좋은 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德畜之) 이러한 법은 가용한 자원이나 환경을 최대한 참고하고 활용하여 그 구체적 형상이 완성되게 되고 (物形之)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야 비로서 널리 쓰일 수 있게 됩니다. (勢成之)

 

是以萬物莫不存道而貴德 道之尊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이러한 이유로 만물은 도가 있지 않거나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지 못하게 되며, 도를 존중하며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릇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상식적이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莫不 (아니하지 못한다) 라는 문구는 뒤에 이어지는 存道 및 貴德 두 문구에 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存道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貴德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도와 덕이 만물의 존재하고 생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새로운 방안의 근본이 되는 도와 덕이라는 두 요소를 자연스럽게 존중하며 귀하게 여기게 된다 이야기합니다.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고로 (앞서) 도를 통해 무언가 만들어진다면 덕을 통해 이것이 길러지게 된다 이야기한 것이다. 키우고 기르며, 안정되게도 독이 되게도 하며, 기르기도 하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

 

道와 德의 역할은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길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여러 선택을 하게된다는 거죠. 키우고 기르는 대상이 있는 반면에 어떤 대상은 머무르거나 아예 없애버리기도 하는 것이고요. 어떤 것은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것은 덮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元德

만들되 소유하지 않으며, 위하되 기대지 않고, 키워주되 다스리려하지 않아야한다. 이를 가르켜 기본이 되는 덕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중요한 역할을 하는 德의 방향성은 어떠해야 할까요? 노자는 여기서 크게 3가지 방향성을 가져야한다 이야기합니다.

 

生而不有, 즉 리더가 본인의 소유물로 하기 위해 만들어내서는 안된다, 공공의 복리를 위한 목적을 지향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경우 일정 성과를 거둔 리더들이 무언가 성과를 만들어내면 그 결과물이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소유하고 나의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경계해야되지 않을까요? 결국 리더라할지라도 그 위치에서 단지 그 역할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爲而不恃 구성원을 위한 결과물을 만들어야지 구성원에 기대어서 일을 추진해서는 안된다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기댄다는 이야기는 다향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보입니다. 그냥 사람들 하자는데로 (그것도 소수의 주변 사람들)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맹목적으로 어떤 지향점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아니면 만들어지 결과물에 나의 이익을 결부시켜 여기에 기생하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요. 어떠한 경우가 되었건 전체 큰 그림에서 성과를 또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목적을 둬야지, 다른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마지막으로 長而不宰 즉 성장시키되 다스리려하여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내가 키워줬으니 내가 하라는데로 해, 해서는 안된다는거죠. 生而不有라는 첫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는 나의 역할을 하였을 뿐 이를 통해 나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도구로 악용하지는 말라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가 바탕이 되는 덕이어야한다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50장

2024. 6. 26. 14:20 from BoOk/pHiLoSoPhY

出生入死

출생입사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亦十有三

생지종십유삼 사지종십유삼 인지생동지사지역십유삼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부하고 이기생생지후

蓋聞 善攝生者

개문 선섭생자

陸行不遇兕虎 入軍不被甲兵

육행불우시호 입군불피갑병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시무소투기각 호무소조기조 병무소용기인

夫何故 以其無死地

부하고 이기무사지

 

 

 

出生入死

밖으로 나옴은 태어남과 같고, 안으로 들어감은 죽음과 같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어쩌면 생명이 나고 죽음과 비슷한 여정을 거칩니다. 나라도, 제도도, 기업도, 문화도 생겨나 발전하고 전성기를 누리다 어느덧 쇠퇴하여 소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노자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 명확하게 쓰여있지는 않지만 나고 들어가는 대상이 여기서는 道라고 생각됩니다.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亦十有三

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열 중 셋이며, 죽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열 중 셋이다. 살고자하였으나 죽는 땅으로 가는 것도 열 중 셋이다.”

 

앞에서와 같이 모든 것들은 새로 세상에 나타나면 길던 짧던 소멸의 과정에 접어들겠지만 얼마나 빨리 사라지냐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라면회사에서 신제품을 한 해에도 고민하여 여러 개를 만들어내지만 이중 시중에서 의미있는 매출을 올리는 제품은 그 중 일부에 그칠 것입니다. 회사에서나 나라에서 뭔가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새로 도입하는 제도나 절차도 몇 가지는 효용성이 입증되어 정착되겠지만 사람들에 관심에서 사라지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고요. 노자는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이를 테면 道가) 방향을 잘 잡아서 10에 3은 살아남지만, 반대로 10에 3은 애당초 방향이 잘못되어 빨리 사라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30%는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죽어 사라진다 이야기합니다.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이는 어째서인가? 그 시작부터 살아남는 방안이 두텁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여러 다른 결말의 원인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제대로 잡았는지가 중요하다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에는 성공의 요인이 더 확실히 그리고 두텁게 고려되었기 때문이라 이야기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道의 완결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대로된 방향성을 가지고 여러 경우의 수를 미리 따져서 실패의 요인을 최소화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둬야된다는 거죠. 앞에서 이야기한 라면의 이야기를 한다면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해서 시중의 제품들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점을 아쉽게 생각하는지 어떤 새로운 제품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적정한 가격에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조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한 제품만이 그나마 성공의 가능성을 볼 수 있지만, 이도저도 아닌 그냥 기존 제품의 Copy나 즉흥적인 요소만을 남을 따라서 만든다면 얼마 안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蓋聞 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被甲兵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대개 건강하게 잘 생을 유지하는 사람은 땅으로 가도 사나운 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에 들어가도 적군에게 당하지 않는다 들었다. 뿔소가 그 뿔을 휘두르거나 호랑이가 그 발톱을 할퀼 바를 없애고, 적군 또한 그 칼을 사용할 바를 (미리) 없애기 때문이다.”

 

陸行不遇兕虎이라는 문장은 무언가 섭생에 신묘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 곳이나 가도 맹수를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이야기이죠. 산으로 간다면 맹수에 대비하도록 미리 사람을 여럿모아 맹수가 접근 자체를 못하도록 준비하거나 그도 안되면 안전한 길로 가는 식으로요.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무하는 총칼이 나만을 피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쟁 자체가 안일어나도록 조치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철저한 훈련을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몸이 익혀야할 것입니다. 상대가 그 폭력을 휘두를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夫何故 以其無死地

어째서인가? 이것이 없다는 건 즉 죽을 곳에 처했다는 의미를 뜻하기 때문이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준비가 없다면 (以其無)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死地) 무언가를 새로 만든다면, 아니면 새로 시작을 도모한다면 철저한 사전 준비와 Case별 Simulation을 통해 실패의 여지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 그것이 전제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노자는 50장에서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9장

2024. 5. 31. 14:24 from BoOk/pHiLoSoPhY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 덕선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신자오신지 불신자오역신지 덕신
聖人在天下 歙焉 爲天下渾心焉
성인재천하 흡흡언 위천하혼심언
百姓皆注其耳目焉 聖人皆孩之
백성개주기이목언 성인개해지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성인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백성들의 마음을 지향하는 바로 삼는다.”
 
여기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어느 사회나 집단에서 Rule을 수립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르킨다 볼 수 있겠습니다. 도덕경이 쓰였던 고대사회에서는 군주를 가르켰을 가능성이 높죠. 요새 환경에서는 꼭 어마무시하게 높고 고고한 사람을 가르킨다 생각하지 말고,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직의 리더 정도로 간주하면 어떨까 합니다.
 
아무튼 이런 성인은 상심 (常心) 즉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좀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어떤 의사결정이나 절차를 수립할 때 “어건 안되!”라던가 “이건 원래 이렇게 해야되!”라는 전제를 깔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앞에서도 누차에 걸쳐서 강조되는 사항인데 나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고 백성심 (百姓心) 즉 구성원의 마음을 의사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이런 방식의 일처리는 이제는 다양하고도 많은 경우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어떤 신제품을 만들어낸다면 그냥 머리 좋은 몇 명들 둘러앉아서, 아니면 사장님이 고민해서 “그래 이렇게 만들자.” 하지는 잘 않습니다. 경쟁사는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소비자들이 기존 상품에 가지고 있는 불만과 개선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고객들도 파악하지 잘 못하는 숨어있는 Needs까지 파악하려고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죠.
 
이 모든 노력은 결국 ‘以百姓心爲心’ 즉 정책이나 개발의 수혜자 즉 소비자가 될 수도 있고, 조직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생각과 욕구를 충족시켜야 되기 때문이죠.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높은 위치에 있어도 나 혼자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착한이에게 나는 선을 배풀며, 착하지 않은 이에게도 나는 역시 선을 배푼다. 덕이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善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善이라는 단어는 우선 착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다 좋아진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죠. 이를태면 선물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시죠.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무상으로 제공하는 물품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 기뻐할까요? 본인이 그전부터 가지고 싶었거나,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가지게되면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받았을 때 아닐까요?
 
이미 앞에서 道는 가치평가가 배제된 모든 절차와 방안을 가르킨다고 이야기했고, 德은 이 모든 가능한 절차와 방안 중에서 현재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혜를 주며, 가치를 향상시키는 방향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德은 善이다라고 여기서 그리고 노자는 강조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더 나아지도록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덕은 대상을 갈라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편견이 반영되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不善者가 惡人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였으면 합니다.)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나를) 믿는 이에게 나는 신뢰를 주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도 나는 역시 신뢰를 준다. 덕이란 (예측 가능하여 안정된) 믿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문장에서 德이 무언가를 개선시키는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德의 신뢰성의 중요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대상에 구분없이 신뢰할 수 있어야 그것이 德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선거제도가 나온다던지, 새로운 신상품이 개발된다던지, 새로운 금융제도가 나오는데 어느 특정 집단이나 사람에게만 유리하고 다른 대상에게는 일관되지 못하게 이렇게도 적용이 되었다가 저렇게도 변한다면 그걸 좋은 제도이며 제품이라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하는 방향성을 가져야되는 것에 더불어 누구나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신뢰성이 동반되어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渾心焉
성인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녹아들기 위해 천하에 머물며 (사람들과) 같이 호흡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라고 경청하라는 의미의 문장으로 해석합니다. 爲天下渾心이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心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르킨다면 이 문장은 ‘사람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在天下 즉 현장 곳곳을 직접 가서 보고 머물러야 하며 歙歙焉 그곳의 사람들과 같이 호흡해서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歙이라는 생소한 글자가 나오는데 저는 ‘들이쉴 흡’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百姓皆注其耳目焉 聖人皆孩之
백성들이 모두 그 귀와 눈을 주목하니, 성인은 이 모두를 아이들을 대하듯 덕을 미치게 해야한다.”
 
사실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리더가 그 구성원들을 애 취급한다는 이야기가 좋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글이 쓰여진 시대상도 감안을 해야겠지만, 이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리더의 의사결정 하나하나가 사람들 각각에게는 생사와 연관이 될 정도로 중요하고 절박한 내용일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자각해야된다. 그리고 이점을 명심하고 누구에게 치우침 없이, 우리가 아이들에게는 모두 잘해주고 싶고 좋은 말만 해주고 싶듯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가 미칠 수 있도록 절차를 수립하고 일을 진행해야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자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면 합니다.
 
마무리 하자면 노자는 무언가를 도모할 때 지금보다는 나아지는 방향성을 가져야되고, 또 모두가 신뢰할만한 것이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에는 사람들의 생각을 경청하여 그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8장

2024. 5. 20. 14:19 from BoOk/pHiLoSoPhY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무위이무불위 취천하상이무사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爲學日益 爲道日損  

배움의 목적은 하루하루 지식을 더하는 것에 있고, 도의 목적은 하루하루 이를 덜어냄에 있다.”

 

이미 앞에서 누차 이야기한 바와 같이 道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이 요리이면 도는 레시피가 될 것이고, 공학이면 물리법칙이 될 것이며, 통치라면 법이 될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여러 절차가 있다고 합시다. 그전부터 해왔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금 당장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기존의 승인 절차와 거쳐야되는 검증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필요한 절차와 과정인가를 고민하다보면 제도를 만드는 당시와는 다르게 현재 시점에서는 정말 불필요한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자는 개선이란 덜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냥 단발성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꾸준히 매일매일 추구하여야되는 행위라고 강조합니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더 이상 (개선)할 바가 없을 때까지 덜어내고 덜어내야 한다.”

 

다들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만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에서 노자가 이야기한 내용과도 조금 어긋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요. 저는 그냥 그렇게 지독하게 개선을 추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여 표현한 정도로 이해하려 합니다.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바라는 바가 없음은 바라지 않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천하를 취함은 더 이상 (개선)할 것이 없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無爲而無不爲라는 문구는 無爲라는 용어가 더 이상 개선할 바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면 그것은 無不爲 즉 안하는 것이 없는 상태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無爲가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다 해본 다음에 더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取天下라는 상태가 단순히 천하를 손에 넣었다가 아니라 최상의 상태, 즉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라고 한다는 이것은 常以無事 항시 무언가 더 할 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죠.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그와 더불어 해야될 일이 있다면 천하를 취했다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取天下라는 용어는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천하제일의 상황 또는 수준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계속 개선해야된다, 당신이 봐서 무언거 더 해야될 것이 있다고 냉정하게 판단되면 당신은 아직 그 분야에서 최고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노자도덕경은 그냥 넋 놓고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철학책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개선하고 또 개선해라, 덜어낼 수 있는 불필요한 절차나 규정이 없는지 항상 살펴라, 지금 무언가 이루었다고 그게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를 반복하여 지극히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직시를 강조하는 책이라고 새삼 느끼게 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7장

2024. 5. 10. 15:23 from BoOk/pHiLoSoPhY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불출호지천하 불규유견천도

其出彌遠 其知彌少

기출미원 기지미소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시이성인 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집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에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으며, 창 밖을 보지 않아도 천하의 도를 통찰할 수 있다.”

 

이번 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같은 취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꼭 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또 내가 해봤다고 그게 꼭 맞으라는 법도 없으며, 그게 전부일 가능성도 낮습니다. 결국 이건 앞의 장에서 강조되던 리더가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其出彌遠 其知彌少

두루 멀리 나아가면 두루 적게 알게된다.”

 

이 또한 위의 문구와 비슷한 의미로 읽힙니다. 혼자 다 알아보겠다고 여기저기 직접 가서보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한계가 있어 상황 파악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이런 이유로 성인은 직접 행하지 않도록 알 수 있으며, 직접 보지 않아도 규정할 수 있으며, 무언가 의도를 가지지 않더라도 이룰 수 있다.”

 

마지막 줄에서 노자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저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전체적으로 노자도덕경은 표현의 간결함 때문에 (다른 의미로는 쉽게 풀어쓰지 않고 많은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에) 숨은 의미를 그리고 구태여 말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으면 내용 전체를 오독할 수 있는 위험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학습의 불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경험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경험과 학습이 없다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으며 다른 사람들의 허황된 이야기에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학습과 경험의 쓸모없음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청과 정확한 자기 객관화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직의 리더라면 여기에 더해 모든 Process의 시스템화 및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포진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추가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내가 무언가를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그리고 일일히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수장이 이웃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위해 직접 그곳에 가서 곳곳을 방문한들 현상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나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종 본인이 정작 할 일은 뒷전이고, 엉뚱한 곳에 참견하며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은 종종 보곤 합니다.

 

첫번째 문장의 “문 밖을 나서지 않고…. 창 밖을 엿보지 않고…”라는 문장은 이런 경우를 비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리더가 정작해야되는 것은 知, 名, 成. 즉 무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여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이번 장에서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5장

2024. 3. 18. 13:48 from BoOk/pHiLoSoPhY

大成若缺 其用不弊

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躁勝寒 靜勝熱

조승한 정승열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大成若缺 其用不弊

큰 성과물은 무언가 흠이 있어 보이지만, 그 쓰임에 나쁨이 없다.”

 

아래 이어지는 글들도 비슷한 의미로 보이는데, 이 문구는 조금 풀어서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두루 사용될 제품이나 제도를 만들려면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그 제품이나 제도를 이용하는 User들에게 나름의 융통성을 부릴 수 있는 Room을 주여야 그 쓰임이 더 커지게 된다.”

 

Platform이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PC의 윈도우나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 / IOS는 그 자체만으로는 활용할 수 있는 용도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토대를 마련해주는 운영체계는 막강한 확장성을 발휘합니다. 다른 개발자들이 Platform에 기꺼히 참가하여 새로운 앱을 만들어내고, 또 그 앱을 유저들이 사용하며 점점 그 Platform의 활용도를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거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하겠다고 해서는 그 쓰임새가 지금보다는 훨씬 한정적일 겁니다.

 

이와 같이 무언가 정말 크게 쓰이려면, 그리고 큰 활용을 기대한다면, 나 혼자 또는 우리 회사나 조직 혼자서 모든 것을 완전무결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부터 재고해야되지 않을까요? 얼핏 보기에는 빈틈으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사람들이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참여하고 싶도록 유도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그 쓰임이 여러 사람의 참여에 의한 것이어서 오히려 폐단이 발생될 가능성을 줄여줄 수도 있지않을까요?

 

大盈若沖 其用不窮

크게 채움은 빈 것처럼 보이나 그 쓰임에 끝이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 내가 채워놓았다고 훌륭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나는 그 아이디어들을 담을 그릇과 방향을 알려주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이 그리고 노력들이 담겨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충만함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한계가 없게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월트디즈니의 Mission인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The mission of The Walt Disney Company to entertain, inform and inspire people around the globe through the power of unparalleled storytelling, reflecting the iconic brands, creative minds and innovative technologies that make ours the world's premier entertainment company

월트디즈니 컴퍼니의 미션은 비할데 없는 스토리텔링, 상징적인 브랜드의 반영, 창조적인 마인드와 혁신적 기술의 힘을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정보 그리고 영감을 제공함으로서 우리를 세계 최우수 엔터테인 컴퍼니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였는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읽다보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듯합니다. 

반면에 넷플릭스의 Mission은 아래와 같이 간결합니다. 

 

Netflix, Inc's coporate mission is "To entertain the world." 

넥플릭스 주식회사의 미션은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무언가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욕심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좋은 말 많이 가져다 붙인다고 훌륭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맥락없는 설명의 과잉은 결국 아무 방향도 제시 못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큰 그림에서 바로 가려는 행위는 굽어보이기도 하고, 큰 그림에서 완성도를 높이려는 행위는 졸렬하게도 보이며, 큰 주제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말주변이 어늘해보이지도 한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躁勝寒 靜勝熱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며, 더위를 이기려면 움직임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그러면 위와 같이 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경우에 다 맞는 해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Case by Case. 즉, 상황에 맞는 대처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울 때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몸에 열을 내야합니다. 안그러면 얼어죽기 십상이죠. 반대로 더울 때는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됩니다. 땡볕 밑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는 왠만한 사람들은 더위 먹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큰 방향성은 제시를 하되, 너무 말단의 영역까지 숨 막히게 해야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은 피해야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장의 융통성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淸靜爲天下正

맑고 차분함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단, 이 모든 것은 투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맑은 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납득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군가 특정 대상이나 인물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는 기준이라고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된다 이야기합니다. 淸淨에서 이야기 하고자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4장

2024. 2. 21. 13:51 from BoOk/pHiLoSoPhY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명여신숙친 신여화숙다

得與亡孰病

득여망숙병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현상을 정의하는 것과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 중 무엇을 더 가까이 해야겠는가? 실체를 파악하는 것과 이익을 확보하는 것 중 어떤 것에 비중을 더 두어야겠는가?”

 

44장에서 다루는 주요 화두는 名과 身, 그리고 貨 세 가지입니다.

 

名에 대해서는 도덕경 1장에서 다루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名可名 非常名) 名은 지금까지 규정되지 않았던 현상을 증명하는, 즉 정의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F=m*a라는 물리법칙은 이때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힘의 크기를 수식으로 규정한 행위입니다. 즉 “名” 현상을 정의하는 행위라고 보면 되죠. 이러한 "名"의 행위는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던 것을 알아내는 행위죠. 우리가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냈을 때 세상에 없던 수소가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었던 것처럼요. 

 

그러면 身 즉 몸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저는 현상의 본질을 가르키는 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의 名의 행위는 현상을 완벽하게 정의하지는 못합니다.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지향점 등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여 규정하기도 하고, 가용한 자원의 한계로 인해 일부만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현상을 규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의 활동 한계로 인해 이후 보완과 수정의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앞에 언급하였으니 수소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이를테면 수소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아낸 사람들도 수소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있는가를 몰랐을 수 있습니다. 단지 수소의 특징은 이러고 저러고 하다는 정도에 그쳤을 수 있죠. 전자 한개와 양성자 한개로 구성된 수소의 구조를 알아낸 다음에도 그러면 그 양성자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자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두 개의 전자와 양성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하고 변화하는지 처음부터 알고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수소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처음에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낸 것이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그 이유로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요? 

 

貨. 위의 이유로 비용에 대한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 즉 이러한 규정을 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즉 한정된 자원을 감안해야되며 또한 어떤 행위가 과연 실익이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세상의 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일까요? 단기적이냐 중장기적이냐의 차이일 뿐 대부분은 사회에 이익이 될 법인 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익이 단순히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더 편한 또는 안전한 환경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지 즉 공리에 기여하는지를 감안하는 것도 모두 이익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名與身孰親, 즉 이 문장은 단순히 둘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추진 중인 행위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본질을 모두 규명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연구가 가장 Ideal 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의 제약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완벽한 본질의 규명은 어렵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身與貨孰多,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활동에 대한 비용을 생각해야되고,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실익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행위도 기대효과 없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위를 왜 열을 내면서 하겠습니까?

 

得與亡孰病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병이 될 것인가”

 

흔히들 과유불급 (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쯤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은 전체적인 면을 생각해야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Total Cost 측면을 감안해야 되는거죠. 양쪽의 상충되는 가치에 대해 어느 쪽을 어 두텁게 하고 어느 쪽을 비울지는 한정된 자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리고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더 얻는 것을 추진해야되는가, 아니면 이쯤에서 조금 손실을 보더라도 추진하던 것을 잠간 멈추는 것이 맞는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돌이켜 보고, 이름을 얻기 위해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익을 탐하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상을 찾다가 명분도 이익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된다는 거죠.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이런 이유로 집착에는 큰 비용이 뒤따르고, 쌓아두기만 해서는 추후 이것이 손실이 커질 수 있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어느 수준이 충분한지를 알면 욕됨이 없을 것이며, 어디서 멈춰야될지를 알면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가히 오래갈 수 있다.”

 

다시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44장은 치우침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론도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활동 및 노력과 투자 그리고 연구의 과정 중 여러 순간마다 과연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괜찮은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3장

2024. 1. 9. 11:32 from BoOk/pHiLoSoPhY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無有入無間

무유입무간

吾是以知無爲之有益

오시이지무위지유익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세상에서 가장 유연한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대상에 치달린다.”

 

첫 문장은 柔와 堅이라는 두 단어가 양끝에서 대치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柔라는 단어는 Flexibility, 즉 융통성을 이야기한다 볼 수 있으며, 堅이라는 단어는 견고하고 변하지 않으려는 기존 질서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이 융통성이 항상 견고한 기존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도라는 이야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생각합니다. 馳騁, 말을 치달린다는 이 단어는 도전 혹은 시도를 해봐야된다는 뜻으로 읽혀집니다. 견고하게 자리잡힌 질서나 법칙이 모두들 이제 무언가 부족하다던가, 아니면 이제 효용성을 다해간다는 생각이 들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융통성을 최대한 발휘해 해결책을 찾아봐야된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無有入無間

“(견고한 질서에) 들이밀려는 시도가 없다면, (개선의) 틈새 또한 찾지 못할 것이다.”

 

실행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문구로 해석됩니다. 누군가 이야기하지 않읍니까. 복권을 사야 당첨을 기대할 수 있다고요. 기존의 체계나 방식 등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다보면 대안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吾是以知無爲之有益

나는 이러하여 무위가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여기에서 노자에서 이야기하는 무위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앞의 두 문구에서 노자는 柔 즉 Flexibility라는 도구로 堅 즉 견고한 것처럼 느껴지는 기존 질서를 계속해서 개선하려 시도해야된다. 하지않으면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노자의 무위는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위는 오히려 Flexxibility를 확보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이라고 이해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무언가를 리더가 규정하고 방향성을 가이드 하기보다, 그리고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방식보다 정말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열린 마음으로 구성원들과 소통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자세야 말로 정말 유익하게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말하지 않는 가르침은 무위의 유익함이다. 천하에 여기까지 미침이 드물다.”

 

무위는 不言의 가르침, 즉 나만의 의사를 고집하지 않는 가운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교훈을 얻어내는 또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사항을 설파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자칫 구성원들의 입을 막아버리고, 활발한 소통을 차단하며, 아집과 독선으로 흐르게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더 나은 방향이 없을까, 내가 지금 추진하는 것은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더 나은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성과만을 아니면 오히려 현상을 악화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야된다는 거죠.

 

이러한 접근은 사실 매우 많은 자원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그래서 사람들은 선뜻 택하기 힘든 것임니다. 천하에 이 경지에 다다르는 사람이 드물게 되는거죠. 하지만 그래야 된다, 그리야 발전이 있게되고 개선을 이룰 수 있게된다고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2장

2023. 12. 4. 16:16 from BoOk/pHiLoSoPhY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고물혹손치지익 혹익지이손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인지소교 아역교지 강양자불득기사
吾將以爲敎父
오장이위교부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가 하나 생겨나면 이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만들어내고, 셋은 만물을 만들어 낸다.”
 
무언가 하나의 새로운 방안이나 방도를 만들어지면  이를 이용한 새로운 방안이나 방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거죠. 그것이 경제학이 되었건, 물리학이 되었건 아니면 교통 법규가 되었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시도가 더해지게 됩니다.
 
이 첫 문구는 무언가 하나의 Idea가 생성되면 기존의 생각들이 더해져 수만가지 Idea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이렇듯 만들어진 수많은 Idea들은 Negative한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혹은 Positive한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상충되는 수많은 방안들이 상호보완하여 새로운 방안을 이루게 된다.”
 
이 문구에서 정/반/합의 원리가 연상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Idea가 되었건, 법칙이 되었건 아니면 규율이 되었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기존 방식의 부족한 부분이 시간이 지나며 부각되기 때문이고, 이런 이유로 개선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벤치마킹을 통해서건, 새로운 Idea를 찾건, 부족한 부분을 메우거나, 장점을 더 살리는 방향으로 변화를 추진하게 되는거고요. 음과 양으로 설명되는 노자의 이 문구는 근대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사람들이 싫어하는 부분은 오직 고립되거나 모자라거나 좋지 않은 것들이다. 이러하여 왕과 상공들이 자신을 칭함에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
 
위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기존의 방식에서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리더들이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개선할 부분이 없는지 찾아야한다는 이야기이며, 이전 왕조시대의 지배층이 왜 “과인이…” 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칭했는지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기본 전제로 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직언하고 개선될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입시다.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고로 모든 일은 혹은 손해가 이득이 되기도하고 이득을 보는 것이 손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의 많은 문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새옹지마의 고사도 그러하고 주역에서 기본적으로 깔고있는 사상도 현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되었지만 현재의 성공사례가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빛을 보는 경우도 종종 목격할 수 있고요.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사람들이 가르침을 나누려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 또한 그를 가르치려 한다. 횡포한 이는 자신의 생각이나 위치를 희생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얻지못한다.”
 
이 문구가 다소 해석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人之所敎라는 문구는 사람들이 가르치고자하는 바로 해석될 수 있는데, 앞의 내용과 연결성을 생각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바, 즉 앞의 이야기와 같이 正과 反이 대립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합의점을 찾는, 즉 合을 도출하는 과정을 敎 즉 가르친다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협상과 합의의 과정이 중요할 것입니다. 나의 것만을 강요해서는 合을 이루기 힘들겠죠. 그래서 마지막의 强梁者 즉 횡포한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其死)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한다 (不得) 라고 해석한 것이죠.
 
종종 횡포한 자는 좋게 죽지 못할 것이다, 라는 식의 저주의 문구로 해석하곤 하는데 다소 앞뒤 연결이 되지않는 듯하다는 생각입니다.
 
吾將以爲敎父
나는 (이를) 장차 가르침의 바탕으로 하려한다.”
 
敎父는 종교나 특정 학문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의미로 많이 통용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父는 근원 즉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마중물이 되는 사항이나 상황으로 사용된 단어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敎父라는 단어는 가르침의 바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번 장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모든 현상이나 Process에는 만족스러운 점이 있는 반면에 부족한 면도 같이 내포하고 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부족한 점을 채우고, Plus가 되는 부분은 공유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을 지속해야된다, 독불장군처럼 나 혼자 옳다고 고집을 피워서는 아무런 것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 하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