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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1.01 노자도덕경 41장
  2. 2023.09.21 노자도덕경 40장
  3. 2023.08.31 노자도덕경 39장
  4. 2023.06.19 노자도덕경 38장 1
  5. 2022.05.19 노자도덕경 37장
  6. 2022.04.18 노자도덕경 36장
  7. 2022.03.29 노자도덕경 35장
  8. 2022.03.15 노자도덕경 34장
  9. 2022.02.18 노자도덕경 33장
  10. 2022.02.16 노자도덕경 32장

노자도덕경 41장

2023. 11. 1. 13:30 from BoOk/pHiLoSoPhY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대소지

不笑不 足以爲道

불소불 족이위도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고건언유지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도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建德若偸 質眞若渝

건도약투 질진약투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휘성 대상무형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도은무명 부유도 선대차성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권력의 높은 자리를 차지한 선비는 제도와 질서를 열심히 따르며, 중간쯤 자리를 차지한 선비는 이를 존중하기도 하지만 때로 따르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권력에서 제외된 선비들은 사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上士, 中士, 下士를 수양의 수준에 따라 구분한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수양이 높은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경건하게 따르지만 어중간하거나, 수양이 덜된 선비들의 경우는 도를 들어도 그냥 대충 따르거나, 심한 경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아냥 거리기만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거죠.

 

하지만 이래서는 뒤의 문구와 연결성도 떨어지고, 또한 士라는 계층의 명사를 사용했다는 것도 의미를 잘못 짚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士는 식자층 즉 엘리트 계층을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이를테면 그냥 테크노크라트일 뿐이죠. 위의 이야기와 같이 수양의 정도를 나눌 것이었다면 聖人이나 君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엘리트 계층에서도 권력 중용되는 계층과 어느 정도 발을 담궈놓은 계층, 그리고 권력에서 소외되었거나 무관한 계층으로 나누기 위해 상/중/하라는 구분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흔히 볼 수 있듯 조직은 실무에 능한 담당자와 관리자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게됩니다. 또 이중 소위 Inner Circle에 포함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기 마련이죠. 이 경우 리더는 자연스럽게 권력에 가까이 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지만 이들의 반응만 보아서는 자신이 내리는 지시가 정말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기 마련입니다. 조직에서 다소 혹은 많이 소외된 사람들의 경우 제도와 지시에 (항상 그런건 아니지만) 객관적 관점을 가지고 냉소적이거나 취사적으로 수용하려는 반면에 권력 주변의 사람들이 예스맨으로만 구성된다면 객관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거죠.

 

현재의 굳건하게 자리잡힌 제도와 관습 그리고 권력은 완벽할 수 없지만,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견고한 기득권층이 형성되면 이에 대한 개선이나 변경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不笑不 足以爲道

냉소적인 사람이 없지 않다면 새로운 도를 만들 여건임에 충분하다.”

 

기존 질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경우는 솔직히 없습니다. 그것이 국민연금이 되었건, 의료보험이 되었건, 선거제도가 되었건 승진제도가 되었건 어디에든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만으로 제도의 결함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개선을 생각해야됩니다.

 

不笑不 즉 “냉소적인 사람이 없지않다면” 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주변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리더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문제가 곪아터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소리만 하는 내 주변 뿐만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두루 들어보고 혹 지금의 절차나 제도 또는 나의 지시에 개선할 점이 없는지 주의를 기울여야된다라는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말이 있으니, 보편화된 도는 보편적이 아닌 부분이 있으며, 진보적인 도는 퇴행적 부분이 있으며, 평등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도에도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으며, 높은 덕에도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정결함은 다른 면에서 보면 욕된 것이며, 넓게 배푸는 덕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明道若昧라는 말에서 明道는 이미 구성원 간에 공감대가 이루어져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道를 뜻한다고 생각됩니다. 밝은 빛 아래에서 사물을 보면 모두 그 형상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처럼 明道는 이미 밝게 드러난 도라는 의미죠. 하지만 이러한 道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昧 즉 어두움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若昧는 직역하면 어두움과 같다라고 해석이 되지만, 저는 이러한 상식적인 절차와 제도 그리고 관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음 것일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 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Process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는 있죠. 그리고 그래야 하고요. 進道若退 즉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여 추진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퇴행적인 부분이 느껴지기도 할 수 있고, 夷道若纇 즉 공평무사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도 누군가에게는 지지자들만을 위한 치우친 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거죠.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아서 上德…. 太白…. 廣德으로 이어지는 나머지 이야기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우리가 칭송하고 떠받드는 제도나 절차, 방식 등이 정말 완전무결할리는 없다는 것을 항상 상기해야된다는 점입니다. 정체되면 결국 썩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을 가장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방도는 Inner Circle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된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建德若偸 質眞若渝

 덕을 세움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과 같다. 참됨의 본질은 변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심하게 이야기하여 偸 즉 훔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집단들이, 다른 나라들이, 다른 회사에서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미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장조사를 하던지 여론조사를 하던지하여 알아내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아이폰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 없던 휴대전화가 나왔다면 다들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이미 휴대전화라는 플랫폼은 시장에 안착되어 있었고, 2G 방식의 통신기술은 3G로 DATA 송수신이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MP3플레이어는 이미 시장에 통용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디지털 카메라는 거액을 주고 들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제각각으로 구매하여야하는 제품이 하나로 합쳐지면 좋겠다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아이폰이 세상에 나왔을 때 애플이 디지털 카메라 회사의 기술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MP3플레이어 회사의 기술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았고요. 누구도 컴퓨터 회사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플은 이미 시장에 있는 기술을 어떻게 더 사용하기 편하고 더 소비자들이 찾아오도록 조합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무언가가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계가 46억년 전 탄생할 때부터 지구는 태양을 돌고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돌던 것을 지구가 태양이 돌도록 바꾼게 아니라요. 단지 사람들이 그랬던 것을 모르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質眞若渝 지금 진리라고 믿는 것도 언젠가 더 나은 이론이나 제도가 나오면 바뀔 수 있다는, 그리고 끊임없이 개선해야된다는 그것이 바로 진리의 본질이라고 노자는 이야기 합니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크게 뻗어나감은 그 끝이 없으며, 큰 그릇은 오랜 기간이 걸려 만들어지는 것이다. 큰 음악에는 특정한 소리가 드물며 큰 물체는 구체적 형상이 없다.”

 

이 문구는 개혁과 개선에는 끝이 없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혼 했다고 끝이 아닌 것 처럼요 ^^)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드러나지 않고 아직 정의되지 않은 방안이나 방도라도 오로지 좋은 도를 목적으로 한다면 내게 없는 것을 차용하고 또 이룸이 좋다.”

 

이미 첫 몇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無名이라함은 아직까지 필요가 없거나 미쳐 알려지지않아 규정되지 않는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道隱 즉 숨겨진 방안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새로운 길을 내려면 지금의 것을 또는 나에게 알려진 것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참고하여 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는 법이니까요.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0장

2023. 9. 21. 11:12 from BoOk/pHiLoSoPhY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반자도지동 약자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反者道之動

현재의 방식에 대한 반발은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게 되는 동기가 된다.”

 

도덕경에서는 영원불멸한 Solution은 없으며, 모든 제도나 관습 그리고 대응방안은 계속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기는 기존 System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현상은 많이 경험하곤 합니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버스를 타려면 현금을 내고 타곤했습니다. 미리 잔돈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목적지를 이야기 하면 안내양이 잔돈을 거슬러주는 방식으로 요금을 냈죠. 그러던 것이 안내양을 없애면서, 운전석 옆에 커다란 통에 현금을 넣으면 잔돈이 기계에서 나오는 식으로 변하게 되죠. 그리고 정액에 대해 토큰을 미리 구매하게 하여 잔돈을 거슬러주는 불편함을 줄이는 방식으로 변하게되었습니다. 이후 전산망을 활용한 납부가 가능해지면서 아예 버스기사는 금액을 계산할 필요없이 지금과 같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통카드를 통해 요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는 버스와 지하철을 통합하여 납부할 수 있는 교통카드 체계가 갇추어졌고, 그 다음은 지역마다 달랐던 카드가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찾아오고, 기존의 불편했던 점을 개선하려는 필요가 한데 묶여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게되는거죠.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존의 것에 대한 반성과 반발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는 불편한 것을 참을 수 없어하거든요. 그리고 새로운 서비스에 열광합니다.

 

弱者道之用

부족하고 약한 부분은 도를 만듬에 쓸모가 된다.”

 

불편함을 주는 부분은 대개 취약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야구팀 감독이라고 생각해보죠. 개선은 어떤 방식에 맞춰질까요? 이미 잘하고 있는 부분에 칼을 들이댈까요, 아니면 부족한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할까요? 다 괜찮은데 2루수가 에러도 많고 타율도 떨어진다고 하면 여기에 개선목표를 두려하지 않을까요? 뭐, 훈련을 2루수에 대해 강화한다던지, 새로운 후보를 2군에서 물색한다던지 아니면 타팀으로부터 Trade나 영입을 통해 보완하는 방법 등을 고민할 겁니다. 지금 잘 치고 잘 수비하는 외야수에 고민하기 보다는 말이죠.

 

이 문구는 다르게는 새로운 Solution을 고민할 때 그 구성원의 약자에 대해 우선 배려하라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던 노자는 현재의 시스템을 계속 살피고 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고민하고 더 나아지게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 만물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생성되지만, 새로운 것이 생겨남은 필요한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생겨난다.”

 

앞 장에서도 많이 이야기가 되었지만 도덕경에서는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거나, 있는데도 내가 몰랐던 것을 활용하여 추가하거나 조합해내는 과정이라는 거죠. 지구는 항상 태양 주위를 돌았습니다. 갈릴레이가 돌도록 만든 것이 아니죠. 아인슈타인이 시공을 왜곡시킨게 아닙니다. 항상 그랬던 원리를 기존의 물리학 이론 등을 통해 알아낸 것이죠.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낸 것은 기존 이론으로 설명이 되지않는 상황에 맞닥트리게 되어 새로운 Solution을 만들어내야될 필요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기존 뉴톤 물리학으로는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無)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낸거라는 (有生) 말이죠.

 

즉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쯤 되겠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9장

2023. 8. 31. 14:51 from BoOk/pHiLoSoPhY

昔之得一者

석지득일자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천득일이청 지득일이령 신득일이령 곡득일이영 만물득일이생 후왕득일이위천하정

其致之一也

기치지일야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貞 將恐蹶

천무이청 장공열 지무이령 장공발 신무이령 장공헐 곡무이영 장공갈 말물무이생 장공멸

후왕무이정 장공궐

故貴以賤爲本高以下爲基 是以後王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고위이천위본고이하위기 시이후왕자위고과불곡 차비이천위본사 비호

故致數輿無輿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고치수여무여 불욕록록여옥 락락여석

 

 

 

昔之得一者

과거로부터 무언가 하나를 얻게된다.”

 

우리 모두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합니다. 외모적으로 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많건 적건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가치관이나 생활습관 그리고 특정 상황에 대한 대응력 등도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게 되는 거죠.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1학년의 나와 6학년때의 나는, 그리고 중학교 때의 나와 고등학교 때의 나는, 대학생 때의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의 나는, 같은 나이지만 동일한 나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보내며 그것이 사람 간의 관계에 의해서건, 공부를 통해서건, 여행을 통해서건 아니면 홀로 사색을 통해서건 하나씩 하나씩 경험과 지식이 쌓이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보다는 지식이 늘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된 사실에 집착할 수도 있고, 사고가 유연해지거나 아니면 편협해질 수도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확대할 수도 아니면 더 고립되어 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그냥 과거의 모습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통해 무언가 “하나”씩은 얻게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얻을 것을 어떻게 취사 선택하느냐에 따라 모두의 미래는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하늘은 이렇듯 얻은 하나 하나가 모여 청명하게 되며, 땅은 안녕되고, 정신은 영험해졌으며, 계곡은 내려오는 모든 것을 보듬어 담고, 만물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며, 후왕은 천하를 바르게 만들려 하게된다. 이를 이루는 것은 (과거로부터 얻어낸) 개별의 하나 하나로부터 이다.”

 

노자는 모든 것은 이렇듯 과거의 하나, 하나가 누적되어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하늘이 저토록 맑고 푸른 것도, 땅이 탄탄하게 이루어져 발 밑이 불안치 않게 됨도, 정신이 만들어져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영험함을 보이는 것도, 계곡이 위에서 흘러내린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것도, 만물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리고 제후와 군왕이 천하를 바르게 만들려 하는 그 수많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도 모두 과거의 경험과 학습에서 얻어진 것들의 총합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비유들이 이 단락에서 나오지만 이를 테면 하늘의 경우 (노자가 물리학을 알고있었을리는 없지만) 하나 하나의 원자들이 모여 현재의 대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구가 처음으로 생성되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대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소행성과의 충돌과, 지구 생성 당시의 불안정성이 누그러지고, 원시생명체들의 생겨나 대사들을 통해 산소와 이산화탄소들을 내뿜으면서 현재의 대기가 생성되고, 결국 우리 지금 숨 쉴 수 있는 하늘이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지구행성의 많은 원소들은 우주가 생성되고 난 후, 수많은 항성이 나고 죽으면서 만들어진 원자들이 우주를 떠돌다 결국 하나로 모여 지금의 토양을 이루게된 것입니다.

 

정신이라는 것도 단순한 원시 생명체의 본능적 대사행위에서 현재의 인류의 고도의 사고 체계로 발달된 것은 진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체의 경험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결과들이 누적되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군왕의 통치는 수많은 판단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 판단 하나에 수혜를 입을 수도 재앙을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렇듯 중요한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요? 결국 학습과 경험과 그리고 본인 기준에 신뢰할 수 있는 주변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天無以淸 將恐裂

 하늘이 그 맑음을 구성하는 것을 잃는다면, 장차 파열될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여기서 無라는 단어는 앞서서 언급된 하나하나의 축적된 구성 요소가 없어지는 상황을 이야기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대기가 어떤 영향에 의해서 모두 아니면 대부분이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면 지금과 같은 하늘일 수는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貞 將恐蹶

땅이 그 안녕됨을 구성하는 것을 잃는다면 장차 폭발할 수 있음을 걱정해야 될 것이다, 정신이 그 구성되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장차 그 영험함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걱정해야될 것이다. 계곡을 구성하는 것이 없어지면 그 수용함이 고갈됨을 걱정해야될 것이고, 만물이 그 구성하는 것을 잃어 버린다면 생명을 다하여 소멸됨을 걱정해야될 것이다. 후왕이 그 통치의 근간을 잃어버리면 장차 몰락할 수 있음을 걱정해야될 것이다.”

 

앞의 天無以淸 將恐裂와 비슷한 의미이므로 반복적인 설명은 하지않으려 합니다. 노자가 하늘과 땅, 정신과 계곡, 만물 등의 비유를 한 것은 어쩌면 侯王無以貞 將恐蹶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조직의 리더라면 자신의 위치는 조직 구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를 망각하면 리더들은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성원 없는 조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없는 나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서 도움을 주고 받는 이익을 공유하는 사이입니다. 내가 남에게 명령을 내리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모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에 당신이 적임자라는 공감대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구성원들이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면 당신을 떠나거나 아니면 당신을 끌어내리려할 것입니다. 하나 하나가 모여있는 조직의 리더라는 역할을 가진 하나의 구성일 뿐이다. 내가 리더라고 내가 전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라는 것이 노자가 말하고자 한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

 

故貴以賤爲本高以下爲基

이러한 이유로 귀함은 천함을 그 근본으로 삼으며, 높은 것은 아래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보잘 것 없어보이는 하나들이 모여 우리 모두를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면 얼핏 천해보이는 직업이나 사람들도 그 사회에 그리고 조직에 꼭 필요한 그리고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아도 소득수준 구성은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억, 수십억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그리고 자산이 수십/수백억을 가진 사람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죠. 회사에서도 임원과 리더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나 이 모든 역경을 거쳐 내 혼자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이 조직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모두에게 더 나은 것이 어떤 방향일지를 고민해야된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만족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한다 이야기 합니다.

 

 

是以後王自謂孤寡不穀

이러한 이유로 후왕은 자신을 작고, 부족하며, 착하지 않다 이야기 한다.”

 

後는 候의 오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 자신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전체 집단의 한 위치일 뿐이다. 겸손해야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이것이 천한 것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邪는 감탄사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로 이야기 할 내용은 없습니다.

 

 

故致數輿無輿

고로 수레를 하나 하나 부품으로 나누면 더 이상 수레일 수 없게된다..”

 

우리 속담에도 “구슬도 꿰어야 서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레에서 어느 부품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나 혼자 잘났다고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면 수레의 손잡이가 아닌, 그냥 나무조각에 불과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위치와 지위는 그냥 큰 집단의 기능적으로 필요해서 잠시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옥과 같이 희귀한 것을 탐내지 말아라, 돌을 모아 구슬목걸이를 만들 일이다.”

 

인생이란 장기 레이스는 한순간의 대박으로 결정될 단순한 게임이 아닙니다. 조금씩이라도 성과를 만들어 그것이 누적되어 그것으로 비롯한 탄탄한 업적이 되어야 하는 거죠. 모든 일에서 그리고 관계에서 한방의 대박을 노릴 것이 아니라, 돌과 같이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조합하여 그리고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고민하여라.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지속해야한다, 라며 39장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8장

2023. 6. 19. 15:47 from BoOk/pHiLoSoPhY

上德不德 是以有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下德爲之而有以爲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有以爲
상인위지이유이위
上義爲之而有以爲
상의위지이유이위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상례위지이막지응 즉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시이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처기실 불거기화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덕이 높으면 (사사로운) 덕은 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덕일 수 있다.”
 
38장은 德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上德不德이라는 문구는 天地不仁으로 시작되었던 5장의 내용을 연상하게 합니다. 천지가 그 나름의 방식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특정 대상으로의 치우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38장에서도 첫 문장은 “높은 덕은 덕이 없다.”라고 역설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는 “특정 대상에 치우쳐 사사로운 덕을 배풀지는 않는다”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른바 덕을 베풀고, 덕을 봤다라고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내가 덕을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자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한정된 자원을 나와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 또는 그런 사람들 먼저 베푼다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사람들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정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될 수 있고, 또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민해야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노자는 높은 덕은 부덕하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是以有德 그래야 덕이 유지될 수 있다, 덕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덕이 낮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덕을 잃지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덕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낮은 德은 특정 대상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 연연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이런 편파성이 계속된다면 구성원 전체적으로는 Leader의 행위를 진정한 덕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특정 대상에 특혜를 베푸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게되죠. 이런 행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사람들도 덕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게되는 즉 無德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권한이 주어지게되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이 우선 생각되기 마련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부터 우선 챙기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기만 이런 행위가 단기간 영향이 낮은 수준에 그친다면 몰라도, 구속력 있고 영향력이 높은 정책이나 방침으로 정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선택은 德이라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 자원을 배분할 때에는 그 수혜의 총량을 어떻게 하면 널리 그리고 최대화 시킬 수 있는가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특정 대상에 치우치는 선택을 해서는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덕이 높은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러려니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덕이 낮다는 것은 어디론가 치우치고, 독선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강요하는 것이다.”
 
“以爲”라는 문구는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문구는 높은 덕을 이룬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치우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에 그게 옳다라고 근거도 없이 선입견을 가져서도 않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그러한 결과물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혹은 특정 방향에 치우친다던가, 아니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한 방향을 고려하여야 上德 즉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라는 의미죠.
 
반면에 낮은 덕은 특정 대상만을 위하고, 혹은 무언가 하고자하는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관습이라던가, 선례라던가 아니면 사심에서 비롯된 이유로 “이런 경우에는 이래야만 해!”라는 전제를 깔아놓으면, 下德 즉 그냥 그런 혹은 불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게된다는 거죠.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仁이나 義라는 것은 그 수준이 높다고 한들, 낮은 덕과 같이 그 지양하는 바가 있으며,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下德爲之而有以爲이라는 문구에서 下德이라는 단어가 上仁과 上義라는 단어로 치환이 되어있습니다.
 
즉, 위에 말한 것을 참고하면 높은 仁이나 禮라는 것도 결국은 결국 무언가 의도한 바를, 특정한  대상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행위 밖에 안된다는 이야기로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교의 핵심 Code인 仁義禮智信 중 첫 세가지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유교를 Target으로 비판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德이라는 가치보다도 仁은 아무리 높아도 그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을까요? 생각하면 노자가 생각하는 방향과 유교의 지향점이 매우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유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되지만 세상에는 명확히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 있고, 노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도달하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요, 순과 같은 성인이 지향점이 되는거고요.
 
무언가 지향점을 놓고, 임금이나 부모 등 기득권에 충성해야된다는 유교의 이론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을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예라는 것도 무언가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요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따르지 않으면, 어께를 걷어올려 그를 부수고 깨뜨리려 한다.”
 
禮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높은 비판을 노자는 가하고 있습니다. 고도화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예절 혹은 예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통치자의 혹은 권력자의 의도된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런 사상이나 정책에 따르지않는 무리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이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제국들은 상대를 야만이라는 표현으로 공격하며 침탈의 근거로 삼았던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교와 이단에 대한 공격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효종 사후 수많은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은 그 복제에 대한 각 정파의 해석과 비난이 근거를 이루었었습니다. 禮가 본래 내걸었던 타인을 공경하고 아끼는 적절한 표현 방식에서 벋어나 이방인을 배척하고 탄합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노자는 보았던 것 같습니다.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이런 이유로 도를 잃으면 덕을 찾게되고, 덕을 잃으면 인을 찾으며, 인을 잃게되면 의를 찾게되고, 의를 잃으면 예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道부터 禮에 이르게되는 관점을 보여주는 문구입니다. 道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게되면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배분하는 德이라는 방식에 의존하게되며, 이러한 德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내가 존경을 받게라도 하여야하는 仁이라는 방식을 모색하게 되고,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 우리끼리의 義理를 잃지않도록 사람들은 고민하고, 그 의리에도 기댈 수 없다면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강압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무릇 예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란 충과 믿음이 얄팍하니, 혼란의 시작이 된다.”
 
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위의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忠이라는 글자는 마음을 나타내는 心자 위에 가운데를 나타내는 中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의 중심 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中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기계적인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中은 Bull’s Eye 즉 핵심이 되는 가장 적합한 상황을 가르키는 단어라고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즉 忠은 가장 적합한 마음상태 또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가르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忠 그리고 미혹되지 않는 믿음 (信)을 남에게 주지 못하는 자들이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禮를 들이밀며 상대를 겁박한다면 시작부터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합니다.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이들은) 나 홀로 앞을 내다본다 이야기하며 자신이 내세우는 방도를 미사여구로 꾸며대니, 우환의 시작이 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기대어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본인만이 앞을 내다본다고 고집하면 밑에 사람들은 그 방도가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칭송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조직에는 소신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내가 다 아는데 말이야” 라는 식으로 전제를 깔아버리는 여기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일은 결국 기대에 못 미치거나 엉망이 되기 십상이고요.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이런 이유로 대장부는 그 바탕이 두텁고 탄탄한 곳에 머물며, 근거와 정당성이 희박한 곳에는 머물지 않으려 한다. 또한,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려 하지 겉만 화려한 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노자의 이야기는 화려한 예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례허식에 눈을 가리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흔히 정당성이 떨어지는 정권은 아무 실속이 없는 거대한 행사나 예복에 집착합니다. 전제국가의 독재자들을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보면 초라한 나라에 걸맞지않는 수많은 훈장과 금빛 메달로 군복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 보다는 대부분 촌스럽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대장부라면 우리의 선택이 어떻게 되어야 실익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일부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두텁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된다 이야기 합니다.
 
故去彼取此
고로 표면을 덮고있는 것을 걷어내어 그 안의 실질적인 것을 취한다.”
 
禮라는 화려한 외피를 걷어내어 그리고 禮로서 공고화된 기존 질서를 벋어나서 무엇이 정말 더 나은 방향인가, 무엇이 더 혁신할 수 있는 한단계 더 나갈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로 노자는 38장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7장

2022. 5. 19. 14:01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통상 어떤 특정 대상을 위주로 하지않아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無爲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않는다라는 더 심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데로 내버려둔다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그런 의미라면 노자는 애시당초 이런 책도 쓰지 말았어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데로 내버려두라고 하려면 이런 글도 쓰는게 아니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변화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오며, 기회의 모습으로도 다가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변화에 대응해야 되며, 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처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에서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대응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전체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해야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단체들만을 위한 방도는 결국 그 집단에게도 해가 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세계의 많은 독제국가나 부폐한 나라들을 보면 특정 계층은 모든 부를 독차지하며 그 기회를 누리는 듯하지만 그 계층 사람들도 경호원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최악의 경우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언제든 최악의 경우로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것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법도 규칙도 관습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최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특정 방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공동체 전체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치지 말아라. 그래야 진정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도덕경 37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왕후들이 이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발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위의 첫 문장은 새로운 방도를 마련함에 있어 지향점 또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즉 전체 이익을 고려하지 어느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태도를 버린다면 그 새로운 방안의 영향을 받게되는 대상들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변화하고 지향하는 바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흔히 결과의 공평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불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의 공평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부당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생각되면 이러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은 조직을, 사회를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들은 이러한 점을 항상 고려하여 일을 추진해야된다고 이야기합니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무언가를 화합하여 만들려할 때, 우리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원소재를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도록) 엄밀히 통제하면서 일을 추진할 것이다.”

 

化라는 단어가 앞 문구에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변화한다는 의미보다는 화합한다는 (또는 조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기존의 또는 현존하는 무언가를 조합하여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作) 있을 테니까요.

 

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띄기 전 원재료 상태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無名이라는 단어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들을 조합하여 또는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새로운 법칙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鎭 즉 진압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 많은 경우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억누르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억눌러야할 대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엄밀히 또는 매우 조심하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큰 대리석 원석을 쪼아내어 조각상을 만들어낼 때 덜어낼 부분과 남길 부분을 매우 조심해서 작업하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식의 해석은 노자의 내용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아직 규정되지 않은 밑바탕 단계라면, 이 또한 어떤 지향하는 또는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에서 가르키는 것처럼 엄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관리 하에 새로운 것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재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통나무는 (樸)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나무 그릇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도끼 자루가 될 수도 있으며, 악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철처한 계획과 숙련된 작업자의 통제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통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업자의 문제인거죠. 통나무는 무엇을 되고싶다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통나무를 탓할 수 없듯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원들의 열망과 역량이 갖춰져 있더라도 잘못된 리더의 생각과 독선에 의해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리한 욕심이 없으면 안정될 것이며, 천하가 장차 자발적으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위의 無欲과 이 문장에서의 不欲은 주어가 다른 대상을 가르키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이 원재료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無欲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不欲은 리더가 무언가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자신을 위한 또는 Inner Circle을 위한 욕심을 가지게되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됩니다. 특히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은 엄밀히 말하자면 위임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활용한다면 분란이 발생될 소지만을 키우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자세를 버리면 靜 즉 조직이, 사회가, 구성원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가게되고 더불어 적절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죠.

 

37장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편견을 가지거나 개인적 욕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과 대신 편견과 아집 그리고 독선을 버리고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면 사회는 계속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6장

2022. 4. 18. 16:36 from BoOk/pHiLoSoPhY

將欲翕之 必姑張之

장욕흡지 필고장지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욕약지 필고강지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욕거지 필고여지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욕탈지 필고여지

是謂微明 柔弱勝强

시위미명 유약승강

魚不脫於淵

어불탈어연

國利器 不可以示人

국이기 불가이시인

 

將欲翕之 必姑張之

하나로 무언가를 모으려 한다면, 잠시 그 대상들을 벌려놓아 운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도덕경 36장은 해석에 있어 다소 논란이 되는 장입니다. 첫 문장의 내용과 비슷한 구조의 내용이 네번째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의 내용을 권모술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翕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합한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를 축소시킨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경쟁자나 아랫사람 중 경계해야될 대상을 몰락시키고 싶다면 일단은 잠간이라도 권한을 더 주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약하게 하려면 잠간 강하게 만들어봐라, 제거하려는 대상이라면 잠간은 같이 해라, 라는 식으로 해석하여 속으로는 검은 마음을 품었지만 겉으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이중적 모습의 냉혹한 리더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36장에서 앞뒤 맥락없이 경쟁자를 몰락시키는 노하우를 말하는 것은 다소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서 고기는 연못을 못벋어난다는 얘기와도 연결되는 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요.

 

오히려 이번 장의 내용은 검증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변화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였습니다.

 

첫 문장의 내용 중 “將欲翕之”라는 말은 기존의 방법이나 정책을 무언가 다른 것과 통합을 하는 변화를 추진하려할 때,  더 나은 방향으로 조정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을 때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必姑張之라는 이야기는 이런 시도에 앞서 잠시만이라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확대해서 운영해보자는거죠. 그렇게 하면 이러한 대상 Process의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이를 통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가 가늠할 수 있게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지방정부에서 대중교통 전용차선 운영을 검토한다고 생각해보죠. 이 경우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주말만 아니면, 주중만 운영하는 것을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기간을 정하고 한달 정도 전면 시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고 뭐가 보완되어야 할 내용인지, 그리고 좋은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하면 더 나을지를 확인하기 나을 수 있습니다.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전면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아니면 이제 폐기를 검토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면, 과연 이런 결정이 맞는지 잠간이라도 나의 의도와 반대방향으로의 검증차원의 운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 뒤의 문구들도 거의 같은 의미 입니다.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차 약화시키고져 하는 사항이 있다면, 잠시라도 강화시켜 운영해볼 필요가 있다.”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차 제거해야될 항목이 있다면, 잠시라도 같이 하여 정말 제거해야될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차 그 권한을 빼앗아야할 대상이 있다면, 일단 권한을 주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화할 필요가 있다.”

 

상기 네 문구의 내용은 거의 모두 현재 있는 것들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는 등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강화시키는 것도 힘든 과정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무언가를 축소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큰 조직일수록 각 조직의, 그리고 담당자에게 주어진 업무가 있고 또한 그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다보면 어떠한 업무 Process에 대해서는 기존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 보다 새로운, 아니면 다른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의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동의 과정없이 리더의 판단만으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조직의 반발은 둘째 치고 독선에 의한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권한이나 업무 과정을 약화시키고 들어내고 다른곳으로 옮기기에 앞서 정말 이런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확인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대상이 되는 항목에 대해 강제로라도 증폭시켜서 아니면 집중 검증하여 정말 그 결정이 옳았는지, 파악해야된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是謂微明 柔弱勝强

이를 미명, 즉 잠간 동안의 시간을 두어 명확화하는 과정이라 한다. 강제로 무언가를 변경시키는 것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微明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희미하게 밝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微라는 단어가 매우 작은 상황이나 순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明이라는 단어가 그 대상의 장단점과 이슈 및 리스크를 명확히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微明이라는 단어는 어떤 대상을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파악됩니다.

 

柔弱勝强이라는 문구는 柔弱함이 强함을 이긴다라고 해석되는데, 거꾸로 해석하면 어떤 변화를 모색할 때 너무 강압적으로 추진하기 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한 방안을 채택하는 것이 더 성공확율이 높다라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당장 시간이 더 걸릴터이고 무조건 ‘내말이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는 약하게 비춰질 수 있으나, 결국 더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거죠.

 

경험적으로도 새로운 책임자들이 자리에 올라 기존의 절차를 용도폐기 시키고 새로운 방법을 강압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고 합니다. 하기만 이럴 때 대부분 그 분께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절차도 같이 운명을 다하곤 하죠. 그리고 그 분께서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냥 하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거죠.

 

왜일까요?

 

魚不脫於淵

물고기는 연못을 빠져나올 수 없다.”

 

물고기 보고 살고 있던 연못을 빠져나오라고 하면, 그 물고기는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 연못은 이미 먹이가 다 고갈되어가거나, 오염이 임박했거나 하더라도 그 연못 안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던 물고기는 그 필요성을 좀처럼 절감하기 힘들 겁니다. 내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실상 그 절차에 익숙한 사람은 변화의 필요에 대해 실증을 하기 전까지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듭니다. (특히 권한이 축소되어나 없어지는 경우라면 더욱 심할 겁니다.)

 

숲 속에 있으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비유와도 비슷한 경우죠. 권한 조정의 대상이 되는 상대는 대부분 기존 절차나 Process, 또는 생활에 익숙해져있어 더 나은 방식으로의 변경에 대해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들기 쉬우며, 심한 경우는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기 십상입니다. 

 

國利器 不可以示人

나라에 도움이 되는 도구는 사람들에게 지시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변화라고, 또는 새로운 절차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지시만 한다고 이루어지고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에 따른 이익을, 효과를 그리고 향상에 대한 가능성을 직접 보여주고 몸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기존의 것을 과감히 떠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자 36장은 안주하려는 조직을 어떻게 변모시켜야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검증과 공감을 통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5장

2022. 3. 29. 16:23 from BoOk/pHiLoSoPhY

執大象, 天下往

집대상, 천하왕

往而不害, 安平太

왕이불해, 안평태

樂與餌, 過客止

낙여이, 과객지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執大象, 天下往

영향력이 큰 것을 이해하고 통제해야, 천하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기 된다.”

 

이번 장은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첫번째 문장은 이러한 실행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執大象” 즉 큰 대상을 잡고 흔들어야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그래야 천하가 往 즉 온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올 往이라는 한자는 나를 중심으로 상대가 온다라는 의미이므로 천하가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는 천하의 사람들이 나에게로 모여든다, 관심을 받아 변화를 주도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문구는 통계에서 사용되는 파레토 법칙을 연상시킵니다. 파레토 법칙은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의 20%의 영향에 비롯된다는 이론인데요, 결국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이를 대상으로 개선을 추진해야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往而不害, 安平太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결과가 해롭지 않도록 추진해야 하며, 걱정없이 평안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선활동의 지향점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뒤의 세글자 安平太를 앞의 구절의 영향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해롭지 않으면 평안하다는 것은 좀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어지는 말로 보았습니다.

 

往而不害라는 말은 직역하면 ‘다가오니 해롭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다가오지 않으면 해롭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머물면, 안주하면 해롭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거죠. 어찌되었건 안주해서는 안된다. 머물지 않고, 변화를 주도해야 위태롭지 않다. 그래야 더욱 안전해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太라는 글자는 앞의 安이나 平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太라는 글자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더불어 더욱 커질 수 있다. 즉 성장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어느 학생이 큰 방향 전환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이나 습관을 개선하여 이전보다는 더 편하게 (安) 더 쉽게 (平) 문제를 풀 수 있게되었다고 생각해보죠.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다보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되는거고, 무언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太라고 생각할 수 있지않을까 봅니다.

 

樂與餌, 過客止

같이 하는 사람들을 즐겁고 배부르게 해야한다,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조차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냥 이 문장을 직해하면 ‘먹고 즐거우니 지나는 손님도 가는 걸음을 멈춘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내용을 생각하면 결국 이 문장은 변화의 지향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道가 수많은 방편 중의 하나라면 德은 이중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 한바 있는데 결국 이 문장은 그 덕의 일면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나는 나그네를 여기서 언급한 것은 우리들만의 주관적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보아도 객관적으로 변화의 방향이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냥 자극적이도 단기적인 성과가 아닌 누가 보아도 공감할만한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져야된다는 거죠..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모든 도의 마지막은 맛이 거의 없는 담담한 상황과 같다.”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해야되나 사실 조금 고민을 했었습니다. 出口를 한 단어로 생각하여 도의 출구라고 생각하여야 할지 그리고 淡이라는 단어는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될지도 잘 판단이 서지를 않더군요.

 

결론적으로 出口는 문자 그대로 끝나는 지점, 빠져나오는 상황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道는 영원하지 않고 마지막이 있으며, 맛이 없는 담담한 상황은 이미 주변에 그 방식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왔었던 길이 이제는 끝났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는 본인이 결정해야됩니다.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기준은 결국 어느 쪽이 더 이익이 되는가, 어느쪽이 우리에게 안정을 줄 것인가, 어느쪽이 지금까지의 관행이나 방식보다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겠는가에 지향점을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활동을 집중해야되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 문장으로 철두철미한 그리고 치열하게 집중하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단순히 보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주시하라, 단순히 듣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경청하라, 또한 단순히 써서 없에는 것은 부족하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도록 활용하라.”

 

보고, 듣고, 고민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냥 쳐다보거나 건성으로 듣지말고 집중해서 그 의미를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자 35장은 이제 것 이야기하였던 모든 道는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강조함과 더불어 치열하게 무엇이 진짜 원인이고 어떤 것을 움직여야되는지 그리고 그 지행점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4장

2022. 3. 15. 14:15 from BoOk/pHiLoSoPhY

大道氾兮 其可左右

대도범혜 기가좌우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常無欲 可名於小

상무욕 가명어소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이기종부자위대 고능성기대

 

 

 

노자도덕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道와 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道라는 것이 단순히 방도를 가르키는 단계에서는 道에 대한 가치 평가가 주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야기한 바와 같이 좋은 道도 있을 수 있고 그냥 그런 혹은 나쁜 道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여러 생각해낼 수 있는 道 중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하거나 나은 방도를 채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가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인지, 구성원 대다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德이라는 가치 개념이 더해지게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大道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大道氾兮 其可左右

큰 도는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 좌우를 가리지않고 모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넘치게 되면 그 물은 어느 특정 방향만으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에 그 그릇이 놓여있는지에 따라 방향에 정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방으로 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大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일단 발현이 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즉 그런데 이건 꼭 좋은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둬야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악법이 있다고 하죠. 아니면 선의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악영향을 미치는 법일 수도 있고요. 모든 국민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게됩니다. 이 역시 大道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특정 인원들 혹은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가 악영향을 입게된다면 결국 그 피해를 중장기적으로는 피할 수 있는 집단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34장에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大道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중 긍정적인 의미의 방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받아들임에 사양함이 없다.”

 

“辭”라는 단어는 설명하다 혹은 사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 문구의 주어인 만물이 아니라 “道”를 혹은 그러한 “道”를 실현하는 사람, 즉 군주를 주어로 인식하여 뒤의 세단어로 이루어진 문구를 해석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만물이 大道에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大道는 이러한 역할을 함에 사양함이 없다,라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왜 군주가 사양을 한다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않고,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大道를 부끄럼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두번째 문장은 결국 첫 문장에 언급한 大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는 물이 넘치듯 이미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그 구성원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고, 그래서 구성원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삶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이야기죠.

 

그러므로 노자에서의 大道는 어떤 거대한 담론을 의미하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은 방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거대담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활화가 되어버린 도구나 관습, 법률, 이론 등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죠. 각 나라마다 수를 표기하는 방법은 각각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0, 1, 2, 3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로마자나 한자로 수를 표기하지는 않습니다.

 

功成不名有

이름이 있지 않은 곳에, 즉 소외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상에 대해 성과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이러한 大道는 어떤 기본적 자세를 가지고 진행되어야 할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萬物 즉 많은 영역이나 대상을 아우르는 방안이 大道라고 한다면, 노자는 그 노력이 지금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아니면 미지의 영역이었던 곳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기존의 방안을 제 아무리 갈고 닦아본들 이미 수혜를 받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용이 되고 있던 대상에서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리되지 못했던 즉 여기서 ‘不名’이라 표현된, 즉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르게는 무언가 큰 한방을 (여기서 말하는 大道) 만들기 위해라면 뭔가 큰 담론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직 미비한 구석이 없는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살피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첫장에서부터 말하듯이 모든 이슈에 대한 해결방안은 혼돈 상태인 無로부터 시작합니다. Chaos 상태에 이름을 주고 (대상을 한정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질서를 부여하는 시작점이니까요.

 

이 문구는 다르게 생각하면 통치라는 것은 아직 손길이 닿지않은, 소외받은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방안을 만드는 것이 이미 충분히 가진 대상들을 위한 것이 된다면, 사회의 균열은 가속화될 것이고 분쟁이 증가하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향평준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한선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통해 사회 전반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 아닐까요?

 

衣養萬物而不爲主

“(중요한 것은) 가능한 많은 대상을 입히고 키우는 방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떠한 특정 대상을 위주로 그 대상만을 위한 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의 연결선상에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 즉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대상에 (萬物) 혜택을 입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지, 특정 대상이나 과제 위주로 돌아가서는 그냥 실행방안에 그치지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내년 영업전략을 짠다고 해보죠. 여기에는 자사, 경쟁사 그리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망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 분석부터 시작하여 자사가 가지고 있는 전체 제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분석과 그 각 제품에 대해 회사 전체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되는지에 대한 의견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잘나가는 특정 제품 위주로 아니면 담당자 본인이 잘 아는 영역에 국한하여 내용이 작성된다면 그걸 회사의 전체적 운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大道 즉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이나 방안을 세우려면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常無欲 可名於小

일상적으로 무언가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점을 찾다보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대상에 대해서도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분석하게된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노자는 큰 방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조그만 이슈들부터, 그리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기본이 되는 것들부터 名 즉 규정되어야 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常無欲이라는 문장은 이미 1장에서도 나왔던 이야기 입니다. 常無라는 것은 결국 항상 무관심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하고 내팽겨둔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냥 그런채로 혼돈의 상황에서 오랜시간 머물러있든 것들을 말하는 거죠. 이러한 대상들부터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되면 (欲) 작은 대상에 대해서도 (於小) 규정을 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 즉 Naming이 진행될 수 있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可名)   

 

조금 의미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냥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구석의 골목부터 쓰레기를 치우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다보면 동네 전체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별 것아니라고 흉물을 방치해 놓으면, 그 영향이 주변 전체에 미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이른바 깨진 유리창의 영향이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이야기가 여기에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을 넓게 돌이켜보고 어느 특정 대상이나 상황 위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가히 큰 방안을 지향한다 이야기할 수 있다.”

 

“歸”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돌아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물이 어떤 道로 돌아와 모여든다, 즉 소속된다는 해석들을 많이 보는데요. 이보다는 여기서의 歸라는 글자는 歸納法 등에서 쓰이는 의미와 같이 무언가 해답을 내기 위해 기본이 되는 현상들을 돌이켜 본다 또는 두루 고려한다 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앞의 첫 네 글자의 의미는 만물 즉 모든 경우의 수를 돌이켜 고려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요, 뒤에 이어지는 不爲主라는 말은 특정 현상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어느 특정 현상에 매몰되거나 치우지지 않고 전반적인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살피고 고려해라, 그래야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이야기겠죠. (可名爲大) 일을 함에 있어 detail을 챙기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可名於小라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놓쳤던,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세세한 것들까지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이고, 그 범위도 어느 특정 부분만이 아닌 전만적인 내용을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라면, 일을 함에 있어 굉장히 치밀해야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결국 자신을 높이려하는 것을 우선시 하지 않아야 능히 큰 도를 이룩할 수 있다.”

 

‘以其終’이라는 말은 중국어로 ‘결국에’라고 해석이 됩니다. 결국에라는 말을 쓴 것은 앞에 경계한 일을 진행함에 위주로 하지말라는 대상이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자신의 편견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무언가 진행해서는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힘들다는 것이죠. 즉 이기적인 의도를 배제하는 것이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3장

2022. 2. 18. 10:15 from BoOk/pHiLoSoPhY

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부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33장은 매우 평이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도 딱히 지도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33장은 내용을 전체적으로 한번에 해석하고 시작하겠습니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자를 지혜롭다하며,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사리에 밝다고 한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상대방을 이겨내는 사람을 힘이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는 사람은 강하다 한다. “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만족함을 아는 사람을 부유하다 하며, 강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그 기반을 잃지않는 자는 오래 가겠지만, 죽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이다.”

33장은 각 문장마다 다소 대치되는 상황을 대치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것도 좋지만 뒤의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은연 중에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나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인지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이야기 한 이후, 하지만 정작 알아야할 것은 나 자신이 정말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알아야 明 즉 정말로 이치에 밝다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두번째 문장도 비슷합니다.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금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겨내는 자가 정말로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단지 남을 꺽는 것에 힘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써야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은 서로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문장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부유하다고 하는 것은 이쯤하면 되었다라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은 어쩌면 미덕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 두문장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의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쇄신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의 굳은 의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단순히 오래가기 위해 나의 기반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위치에 있지않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면 그것이 진정한 오래감이 아닐까, 라고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합니다.

33장의 내용은
1) 나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판단하고,
2) 그 문제를 이겨내려는 방안을 마련하며,
3)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개선 추진하여야 한다
4) 또한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단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없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라고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2장

2022. 2. 16. 13:34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상합 이강감로

民莫之令而自均

민막지령이자균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知止 可以不殆

지지 가이불태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방도가 있더라도 그 이름이 없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미미한 문제일지라도 천하는 이를 다스릴 수 없게된다.”.

 

노자의 첫장을 여기서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名은 Naming, 즉 대상을 규정하는 절차로 해석한다면, 32장의 첫 구절 ‘道常無名’, 즉 이름이 없는 방도라는 것은 여하한 이유로 채택되지 않은, 그러므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방도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간혹 ‘도는 영원하지만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멋있어 보이는 해석이긴 하지만.. 무슨 말이죠?)

 

좀 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죠. 예를 들어 차도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주변을 살피고 보행자의 판단 아래 눈치껏 건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모든 도로에 지하도나 육교를 설치하는 방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신호등을 설치하여 빨간불이 나오면 서고, 파란불이 나오면 건너가는 걸로 약속을 정할 수도 있고요. 이것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안이 10가지, 20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어느 방안을 채택할지 고민을 하게되죠. 아무튼 채택되지 않은 방안들은 모두 ‘道常無名’ 즉 규정되어지지 않은 (즉, 채택되지 않은) 방도가 되게되는 겁니다.

 

‘樸雖小’ 소박하고 비록 작은, 즉 아무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天下莫能臣也’ 세상사람들은 다스릴 수 없게됩니다. 생각해보시죠. 길 건너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방안이 없다면 이 쉬운 이슈도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게됩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지도자가 만약 이를 (만들어내어) 지켜낸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찾아들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경우 여러 방도 중에 합당한 방도을 선택하여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군주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주변의 의견을 물리치고 현실에도 맞지않는 방도를 독단적으로 수립하여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최적의 방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조금 더 보완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萬物將自賓’ 이런 지도자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즉 모이게 된다는 말이겠고요.

 

문제가 눈 앞에 닥쳐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뭉게고 아무것도 안하는 리더들을 종종 보곤합니다.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문제를 대응하는 것이건 아니면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건, 여러 방안 중에 결국 하나의 방안을 채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리더의 몫입니다.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가 서로 간에 화합하면 감로가 내리게된다.”

 

이 문장은 앞의 28장의 내용에 연결선상에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서로 알맞은 조합을 통해 개선방안을 채택하게되면, 여름철 내리는 단비와 같이 구성원들이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民莫之令而自均

사람들이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따르게 된다."

 

어떤 사회에 제도나 풍습, 관습 등도 그 구성원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도가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방도와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취지를 공감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도도 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 취지에 공감하고, 효과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방도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된다면 누가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는 것은 잠시 기다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을 누가 따로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희미해도 차를 몰면서 중앙선을 지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새로운 제도를 시작하면 이름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이름 또한 언젠가는 다함이 있다. 뭇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앞에서 새로운 대안이나 방안을 제시하는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면, 지금부터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노자는 여기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Originality를 영원히 유지시키는 제도도, 법칙도, 관습도 있지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통용되는 방안이 언젠가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끝날 것음을 경험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라도 알고 있습니다.

 

知止 可以不殆

멈출 때를 알면 가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기존의 것을 멈춘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이대로 타성에 젖어 기존의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냥 하던 데로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관습에 안주해서는 어느샌가 위기에 처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변의 국가들은 소총병으로 변모하는 시대에 장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에 안주하는 나라가 있던가고 생각해보시죠. 그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기존의 제도나 세력이 강고하게 자리 잡았더라도 변화가 눈앞에 다가왔다면 변해야합니다. 아니면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유하자면 천하의 道라는 것은 마치 강과 바다로 흐르는 물줄기와 같아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라는 것은 계속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끝임없이 적응해야되며 나도 변화해야 합니다. 안일하게 기존 방식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만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 하며 노자는 32장을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