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道氾兮 其可左右
대도범혜 기가좌우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常無欲 可名於小
상무욕 가명어소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이기종부자위대 고능성기대
노자도덕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道와 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道라는 것이 단순히 방도를 가르키는 단계에서는 道에 대한 가치 평가가 주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야기한 바와 같이 좋은 道도 있을 수 있고 그냥 그런 혹은 나쁜 道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여러 생각해낼 수 있는 道 중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하거나 나은 방도를 채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가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인지, 구성원 대다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德이라는 가치 개념이 더해지게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大道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大道氾兮 其可左右
“큰 도는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 좌우를 가리지않고 모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넘치게 되면 그 물은 어느 특정 방향만으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에 그 그릇이 놓여있는지에 따라 방향에 정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방으로 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大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일단 발현이 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즉 그런데 이건 꼭 좋은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둬야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악법이 있다고 하죠. 아니면 선의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악영향을 미치는 법일 수도 있고요. 모든 국민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게됩니다. 이 역시 大道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특정 인원들 혹은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가 악영향을 입게된다면 결국 그 피해를 중장기적으로는 피할 수 있는 집단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34장에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大道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중 긍정적인 의미의 방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받아들임에 사양함이 없다.”
“辭”라는 단어는 설명하다 혹은 사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 문구의 주어인 만물이 아니라 “道”를 혹은 그러한 “道”를 실현하는 사람, 즉 군주를 주어로 인식하여 뒤의 세단어로 이루어진 문구를 해석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만물이 大道에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大道는 이러한 역할을 함에 사양함이 없다,라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왜 군주가 사양을 한다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않고,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大道를 부끄럼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두번째 문장은 결국 첫 문장에 언급한 大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는 물이 넘치듯 이미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그 구성원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고, 그래서 구성원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삶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이야기죠.
그러므로 노자에서의 大道는 어떤 거대한 담론을 의미하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은 방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거대담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활화가 되어버린 도구나 관습, 법률, 이론 등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죠. 각 나라마다 수를 표기하는 방법은 각각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0, 1, 2, 3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로마자나 한자로 수를 표기하지는 않습니다.
功成不名有
“이름이 있지 않은 곳에, 즉 소외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상에 대해 성과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이러한 大道는 어떤 기본적 자세를 가지고 진행되어야 할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萬物 즉 많은 영역이나 대상을 아우르는 방안이 大道라고 한다면, 노자는 그 노력이 지금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아니면 미지의 영역이었던 곳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기존의 방안을 제 아무리 갈고 닦아본들 이미 수혜를 받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용이 되고 있던 대상에서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리되지 못했던 즉 여기서 ‘不名’이라 표현된, 즉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르게는 무언가 큰 한방을 (여기서 말하는 大道) 만들기 위해라면 뭔가 큰 담론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직 미비한 구석이 없는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살피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첫장에서부터 말하듯이 모든 이슈에 대한 해결방안은 혼돈 상태인 無로부터 시작합니다. Chaos 상태에 이름을 주고 (대상을 한정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질서를 부여하는 시작점이니까요.
이 문구는 다르게 생각하면 통치라는 것은 아직 손길이 닿지않은, 소외받은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방안을 만드는 것이 이미 충분히 가진 대상들을 위한 것이 된다면, 사회의 균열은 가속화될 것이고 분쟁이 증가하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향평준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한선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통해 사회 전반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 아닐까요?
衣養萬物而不爲主
“(중요한 것은) 가능한 많은 대상을 입히고 키우는 방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떠한 특정 대상을 위주로 그 대상만을 위한 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의 연결선상에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 즉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대상에 (萬物) 혜택을 입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지, 특정 대상이나 과제 위주로 돌아가서는 그냥 실행방안에 그치지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내년 영업전략을 짠다고 해보죠. 여기에는 자사, 경쟁사 그리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망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 분석부터 시작하여 자사가 가지고 있는 전체 제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분석과 그 각 제품에 대해 회사 전체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되는지에 대한 의견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잘나가는 특정 제품 위주로 아니면 담당자 본인이 잘 아는 영역에 국한하여 내용이 작성된다면 그걸 회사의 전체적 운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大道 즉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이나 방안을 세우려면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常無欲 可名於小
“일상적으로 무언가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점을 찾다보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대상에 대해서도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분석하게된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노자는 큰 방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조그만 이슈들부터, 그리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기본이 되는 것들부터 名 즉 규정되어야 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常無欲이라는 문장은 이미 1장에서도 나왔던 이야기 입니다. 常無라는 것은 결국 항상 무관심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하고 내팽겨둔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냥 그런채로 혼돈의 상황에서 오랜시간 머물러있든 것들을 말하는 거죠. 이러한 대상들부터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되면 (欲) 작은 대상에 대해서도 (於小) 규정을 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 즉 Naming이 진행될 수 있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可名)
조금 의미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냥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구석의 골목부터 쓰레기를 치우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다보면 동네 전체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별 것아니라고 흉물을 방치해 놓으면, 그 영향이 주변 전체에 미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이른바 깨진 유리창의 영향이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이야기가 여기에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을 넓게 돌이켜보고 어느 특정 대상이나 상황 위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가히 큰 방안을 지향한다 이야기할 수 있다.”
“歸”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돌아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물이 어떤 道로 돌아와 모여든다, 즉 소속된다는 해석들을 많이 보는데요. 이보다는 여기서의 歸라는 글자는 歸納法 등에서 쓰이는 의미와 같이 무언가 해답을 내기 위해 기본이 되는 현상들을 돌이켜 본다 또는 두루 고려한다 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앞의 첫 네 글자의 의미는 만물 즉 모든 경우의 수를 돌이켜 고려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요, 뒤에 이어지는 不爲主라는 말은 특정 현상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어느 특정 현상에 매몰되거나 치우지지 않고 전반적인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살피고 고려해라, 그래야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이야기겠죠. (可名爲大) 일을 함에 있어 detail을 챙기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可名於小라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놓쳤던,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세세한 것들까지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이고, 그 범위도 어느 특정 부분만이 아닌 전만적인 내용을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라면, 일을 함에 있어 굉장히 치밀해야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결국 자신을 높이려하는 것을 우선시 하지 않아야 능히 큰 도를 이룩할 수 있다.”
‘以其終’이라는 말은 중국어로 ‘결국에’라고 해석이 됩니다. 결국에라는 말을 쓴 것은 앞에 경계한 일을 진행함에 위주로 하지말라는 대상이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자신의 편견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무언가 진행해서는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힘들다는 것이죠. 즉 이기적인 의도를 배제하는 것이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