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hIsToRy'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5.12.04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 2015.07.22 비잔티움 연대기
  3. 2015.04.02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 2014.07.07 헤이케 이야기
  5. 2011.12.07 십자군 이야기
  6. 2010.02.22 크리스탈 나흐트
  7. 2009.02.23 사기본기
  8. 2007.09.17 콘스탄티노플 함락
  9. 2007.08.23 우리 궁궐 이야기
  10. 2007.06.01 한국전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국내도서
저자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 박은정역
출판 : 문학동네 201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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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작품은 세계2차대전 당시 참전했던 200명 가량의 당시 소비에트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크리스탈 나흐츠와 비슷한 구도를 가졌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지만 어쩌면 문학작품으로서는 그저 그런 정도의 책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에피소드 외의 작가의 Comment는 어쩔 때는 지루하기도, 어울리지 않게 비장하게도 아니면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사실 2차대전 발발 이전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관계였습니다. (조약을 맺을 당시 서방의 프랑스와 영국은 멘붕에 빠졌었죠.) 그러던 독일이 1941 6월에 전격적으로 소련 침공에 나섭니다. 지금도 이때 독일 침공의 배경이나 적절성 여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지만 아무튼 침공 초기만 놓고 보면 독일의 승승장구였습니다. 1930년대 소비에트 내부에 발생된 숙청에 의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의견 등 참패의 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아무튼 소비에트의 주력군은 전쟁 초기 거의 괴멸 상태에 빠지게 되고 삽시간에 레닌그라드까지 밀리게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참전하여 전선으로 달려갑니다. 최전방의 고사포 부대, 저격수, 전투기 조정사로부터 세탁병, 의무병, 통신교환수 등 다양한 부문의 참전자들의 증언이 책 전체에 걸쳐 소개됩니다.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책의 사연들을 읽다 보니 불과 열여섯, 열여덟에 불과한 아이들이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는 사실 하나로도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누구는 원피스 차림으로 또 누구는 가진 돈을 털어 사탕을 한꾸러미 사들고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목할 만한 점은 소수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참전 경험을 풀어놨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때로는 여성의 감성을 다루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여성이라고 남성보다 더 연약하다던지 감성적이라던지 하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성 중에도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있고 안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멍청한 사람도 있을 거고요.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비중이 좀 더 많냐 적냐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건 남성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뛰어든 군에서 여성은 결국 소수자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참전용사들이 받은 싸늘한 냉대는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공산주위를 위해 꽃 같은 청춘을 바쳤다. 전쟁에 돌아오고 나는 더 이상 보통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지금도 붉은 색은 꽃조차도 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된 나에게 조국은, 가족은, 이웃은 전쟁터의 남자들에 둘러싸여 몸을 굴린 추잡한 여자로 모함하고 포로로 잡혔으면서 왜 죽지않고 살아남았냐며 배신자의 낙인을 찍었다며 울분을 토합니다. 비난 받을 사람이 누구냐? 전쟁이 터지면 막강한 소비에트의 전사들의 칼에 적들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인민을 기만한 그들이, 파시스트의 탱크부대에 대항하라고 기마대를 보낸 그들이 조국을 배신한 사람들이 아니냐고.

 

영화로도, 소설로도 아니면 음악이나 미술로도 전쟁을 다룬 작품들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라는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희생되는 이름 없는 전사들에게 결국 전쟁은 야만적인 폭력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 작품은 다시 일깨워줍니다.

Posted by Tony Kim :

비잔티움 연대기

2015. 7. 22. 15:31 from BoOk/hIsToRy

 


비잔티움 연대기

저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출판사
바다출판사 | 2007-04-1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한 지중해의 보석 이스탄불. 동서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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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렇게 좋은 책을 찾아 읽게도 됩니다. Soft Cover로는 6, 하드커버로 3권에 달하는 이 책을 작년 말 사전지식 없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들어 읽게되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에 ‘고대에서 봉건제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이 경제/사회학적 분석 위주라면 ‘비잔티움 연대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마치 긴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로마제국은 최전성기를 지나 방대해진 제국의 영토를 한 사람의 황제가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지게되자 제국의 영역을 작게는 둘, 많게는 넷까지 정제와 부제가 나누어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현재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시작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에 의해 패망하기 전까지 1,100년의 넘는 기간을 유럽 역사의 한 축으로 시대를 영위했습니다. (그야말로 천년 제국이죠.)

 

암흑기라고 표현하던, 어떻게 이해되던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이 봉건주의 체제로 이행되는 와중에도 동로마 제국은 유럽 동편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주의 국가 체계를 유지합니다.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체제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로마제국은 전체 유럽 입장에서 보면 동방의 침략에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기독교 승인으로 이후 유럽 경제, 문화, 군사 모든 면에 큰 영향을 줍니다.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거의 로마 제국 시기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만지케르트 패전과 십자군 전쟁의 타격으로 이후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눈을 뽑아 실명시키는 잔혹한 형벌, 환관과 왕실의 암투, 암살에 이은 찬탈과 같은 자극적인 측면도 있다지만 동서간의 종교 갈등, 동방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등 저자는 다각적인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큰 축이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와 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사라고 한다면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제국의 한 축으로서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이며 충분히 중요한 서양사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동로마사가 평가 절하된 것은 현재 동로마제국 영역이 이슬람권인 점, 역사학계의 주류가 서유럽 위주였던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겠죠.

 

사람들 이름이 다 비슷해서 상당히 헥갈리기는 했지만 이런 훌륭한 책이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삼국사기

저자
이병도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1996-05-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한국사에 대해 다룬 책으로, 삼국사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책으로...
가격비교

초기 고구려사에서 태조대왕과 관련된 기사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조대왕은 유리왕(琉璃王)의 손자 중 한명으로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 물러난 모본왕을 이어 7세에 불과한 나이에 제위에 올랐습니다. 모본왕은 당대의 폭군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악행은 다했던 왕으로 보입니다. 이런 왕의 결말이 대부분 그러하듯 결국 제위 6년만에 측근에 의해 시해되고 맙니다. 이후 신하들이 모여 재사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재사가 끝끝내 고사하여 재사의 아들이었던 궁이 제위에 오르게됩니다. 태조대왕 제위 이후의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11살이었던 56 (태조왕 4) 동옥저를 합병한 것은 태조대왕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태후 섭정 때의 일로 추정되며 당시 강성했던 고구려의 역량에 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나이 20대인 68년과 72년에 고구려는 갈사국과 조나를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등 이 시기 본격적인 강국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삼국사기 기록이 그러하듯 태조대왕과 관련된 기록도 매우 단편적이고 부실하지만 이를 통해 태조왕은 치세 동안 인접한 후한을 괴롭히며 세력을 넓히고 안으로는 내치를 통해 안정을 꾀하면서 고구려는 비로서 국가다운 체계를 갖추어 나간 듯 합니다.

 

태조대왕은 우리 역사상 (기록이 정확하다면) 최장수에 최장기 군주로 기록될만합니다. 워낙에 이른 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도 했지만 아우인 수성에게 양위할 당시 제위에 오른지 94년째였으며 선왕으로 물러나서도 20년을 더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붕어 당시 임금의 나이는 119세였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100세에 양위를 하였으나 제위 71년부터 만약을 위해 양위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는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아우인 수성(遂成)이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태조대왕은 왜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하지 않았을까 의문도 들게됩니다. 차대왕 수성이 왕위에 등극한 것도 그의 나이 76이었을 때였습니다. 차대왕이 비록 20년이나 제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76세라면 지금으로도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알기 힘들지만 양위 당시 태조대왕의 아들들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측면이 고려되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우였던 수성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훗날 차대왕이 되는 수성은 태조대왕의 치세동안 눈부신 활약을 보입니다. 태조대왕 후기 후한과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수성의 활약으로 고구려는 수차례의 외침을 막아내었고, 유능한 장수이자 50대 후반의 노련한 황족이었던 수성은 80이 다가오는 시점의 태조대왕에게는 가장 검증된 후계자였을 것입니다. 황족이자 군사적 성과를 보인 수성이 이에 더해 만만치 않은 자체 세력까지 가졌다고 추측한다면 태조대왕으로서는 이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 또한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수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든든한 측근들과 무시할 수 없는 사병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수성도 또한 자연스럽게 대권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태조대왕의 비극은 그 자신이 너무 장수를 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정사에 정식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수성은 이제나저제나 태조대왕이 곧 죽거나, 아니면 기력이 다해 곧 자신에게 선위할 것으로 기대하였겠지만 그로부터도 십수년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자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아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긴박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94(서기 146) 가을 7, 수성이 왜산(倭山) 아래서 사냥하면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들어가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생각해보라.

근신들이 모두 말했다.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혼자 나서서 말하였다.

“지난번에 왕자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왕자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수성이 말하였다.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과 침이 되는 것인데 어찌 의심하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 왕자께서는 비록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임금의 폐위를 위해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의 실로 만 균(, 1균은 30근임)의 무게를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왕자의 선함을 깊이 아시어 반드시 왕자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불쾌하게 여겼다. 근신들은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연로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질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령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에 근심을 초래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해야 합니다.

 

 

태조대왕 80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수성은 대왕께는 맏아들이 있는데 자신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겉으로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었습니다. 결국 자신 아니면 누가 왕이 되겠는냐는 자신감의 발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로부터도 십수년이 지나도록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려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친동생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국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등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별궁으로 물러납니다. 친족간의 상쟁은 피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양위 이후 태조대왕과 관련된 큰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즉위 다음해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고복장을 사사합니다. 그리고 즉위 3년째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이었던 막근마저 죽입니다. 그의 동생이었던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였던 고복장을 죽인 것은 왕조사회에서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힘겹게 왕위에 오른 왕들이 권력을 잡은 후 기존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진행하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선왕이 살아있는 중에 선왕의 큰 아들을 숙청하는 것은 고구려 초기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03세의 선왕은 한때 자신을 도와 고구려의 번영을 같이 이끌었던 아우가 자신의 측근 뿐만 아니라 친자식까지 죽이는 과정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요? 무려 94년을 제위에 있었던 태조대왕입니다. 고구려를 이만큼 발전시켰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죽지도 못하여 자신의 아들들이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것마저도 무기력하게 지켜보게만 되었습니다. 속절없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대왕 간 애증의 관계는 결국 차대왕 즉위 20년만에 차대왕의 종말로 마무리됩니다. 삼국사기는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20(서기 165)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 연나(椽那)의 조의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임금을 시해하였다. 호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Posted by Tony Kim :

헤이케 이야기

2014. 7. 7. 19:11 from BoOk/hIsToRy

겐지모노가타리를 언젠가 읽어보려다 그 방대한 부피에 기함하여 포기하였는데,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가 두 권으로 번역된 헤이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씀. 이 정도는 괜찮다 싶어 읽어보게 되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 헤이케는 平氏 家門이라는 의미의 平家인데 말 그대로 일본 헤이안 시대 때 권력을 잡았던 다이라 일가의 성쇠를 다룬 소설. 작품 자체가 승려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던 작품인지라 작가 미상인 고전인데 (마치 니벨룽겐의 이야기 같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절대권력을 유지하던 다이라 일가가 리더 기요모리와 나름 합리적이었던 이인자 시게모리의 사망을 기점으로 겐지 일파의 저항에 점차 세력을 잃어가다 단노우라 해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사실 단노우라 해전의 내용은 전에 코스모스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어서 아, 그 이야기가 이 시대적 배경을 가진 내용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단노우라 해전은 일본 역사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 다이라와 겐지 가문, 두 세력이 맞서는 가운데 다이라 가문이 수도에서 퇴각하면서 삼종신기와 함께 가운데 안토쿠 천황을 수도를 떠나 피난지로 데리고 가게되고 이후 천황이 없는 수도를 장악하던 겐지 일파 또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게 되면서 두 명의 천황이 각 진영 별로 세워지는 전대 미문의 상황이 발생되었다는 점인데. 결국 단노우라 해전에서의 패배로 안토쿠 천황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게 되면서 겐지 일파가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헤이케 이야기는 기요모리의 전횡과 폭정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가지만 세력을 잃고 탄압 받는 측은 어느 편이라도 시종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작품의 기조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권선징악 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사실 이러한 고전은 내용에 앞서 작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문체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닐까? 아래 안토쿠 천황의 마지막을 다룬 장면과 같이.

 

 

주상은 올해 겨우 여덟 살이 되셨으나 그 연세 또래보다 한층 점잖으시어 용모 미려함이 주위조차 환하게 비추더라. 머리채는 검게 늘어져 허리까지 출렁이는구나. 망연자실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으로 "아마님,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시오" 하고 여쭈시는지라 어리신 왕을 마주보며 눈물을 억누르고 말씀하시기를 "왕께서는 아직 알지 못 하시오이까. 전생에 십선 계율을 지키신 공덕이 있어 금세에 만승천자로 태어나셨으나 악연이 원인으로 이미 그 운도 다하셨나 이다. 우선 동쪽을 향하시어 이세 대신궁에 작별의 말씀 올리시고 그런 후에 서방정토의 마중을 받잡자 생각하시어 서쪽을 향하시고 염불을 올리소서. 이 나라는 숙산변토로 마음도 불편하실 것이니 극락정토 좋은 곳에 함께 가시지요" 하고울며불며 말씀을 올리시니, 산 비둘기 빛 어의에 머리는 좌우로 갈라 빗어 올리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작고 어여쁜 손을 합장하시고 우선 동쪽을 우러러 절하여 이세 대신궁에 작별의 말씀 올리시고 그 후에 서쪽으로 향하여 염불을 외셨는지라, 이위 마마는 그대로 주상을 품에 안고 말씀하시기를 "바다 물결 아래에도 왕궁이 있나이다" 하고 위로하시고천길 물 속으로 가라앉으시었다.

 

Posted by Tony Kim :

십자군 이야기

2011. 12. 7. 12:27 from BoOk/hIsToRy
십자군 이야기 2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시오노 나나미(Nanami Shiono) / 송태욱역
출판 : 문학동네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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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는 전 3권으로 구성될 예정이며 현재 2권까지 출간이 된 상태. 1권에서는 1차 십자군 원정의 배경 및 예루살렘 왕국 설립까지의 역사에 대해 다루며 2권은 살라딘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100년만의 역사를 뒤로 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3권은 총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 중 나머지 역사를 다루겠지만 주로 살라딘과 3차 원정대 사이의 이야기가 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다.

 

예전에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살라딘이나 문둥이 왕 보두앵 4세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됐었는데 그 전까지 십자군 원정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졌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서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있다. 십자군 이야기 2권은 그런 이유로 (물론 영화에는 영화적 Fiction이 많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본 것들이 연상이 되어 책을 읽으면서도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추후에 이루어질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간의 문제도 단초가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되고 실상 십자군 원정의 시작은 유럽 내부의 교권과 왕권과의 갈등에 기인한 것 등의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創業易 守成難이라는 말이 있는데 예루살렘 왕국의 경우도 이런 Case가 아닐까 싶다. 물론 머나먼 유럽에서 온갖 역경 속에 세워진 나라를 창업이 쉬웠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겠지만 이렇게 힘들게 세운 나라를 근 100년 만에 무너지기는 또 얼마나 허무할 정도로 쉬운지가 2권에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작가는 초기 십자군 구성 인원 대비 2에서 3세대로 세대 교체가 진행되면서 발생된 지도층의 역량차를 주요한 이유로 들고 있지만 사실 몰락의 징조는 처음부터 안고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국가를 세워 운영함에 있어 기존 구성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끌어안는 방식이 아니라 박멸해야될 악의 무리로 규정하고 새 판을 짜려 하는 것은 어떻게든 무리수를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런 상태에서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한다는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똘똘 뭉쳐도 대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국가 안에 원한을 가진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안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아닌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일은 힘들어지게 되고 만다.

 

종교는 없지만 그 신이 어느 신이든 바글거리는 하늘 아래의 인간들이 유적이 남아있는 땅을 차지하겠다면 신의 이름을 파는 것이 자기 뜻이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대의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죽고 죽이는 전쟁에 내몰리는 불행한 역사를 인간들이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진짜 전쟁이던 아니면 생활하는 중에서라도 말이다.

Posted by Tony Kim :

크리스탈 나흐트

2010. 2. 22. 22:50 from BoOk/hIsToRy
크리스탈나흐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마틴 길버트 (플래닛,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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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1월 7일 프랑스의 젊은 유태인 헤르셀 그린스판은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외교관 폼 라트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후로 독일로부터 광기 어린 폭력이 시작되었다.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이 박살이 나던 그날 밤을 사람들은 크리스탈 나흐츠, 수정의 밤이라 일컬었다. 전후 사정은 필요도 없었고 굳이 알려들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수백, 수천년을 그들과 같이 지내던 공동체의 역사는 하루 아침에 머리 속에서 지워져 이미 전체주의 파시즘에 발을 들인 그들은 천인공노할 유태놈들이 우리의 동포에 테러를 가한 것으로 상황을 단순화시켜 버렸다.

쇼비니즘, 파시즘, 제노포비아.

광기는 모든 논리를 뒤흔들었고 기존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 당한 유태인 중에는 1차 대전 참전용사들도 있었으며 이전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였다는 자부심에 철십자 훈장을 자랑스러워 했던 이들도 있었다. 어떤 가치가 5살 먹은 아이들을 수용소로 끌고가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저자는 수백의 사례와 탄압의 기억들을 인터뷰를 통해 때로는 직접 보내온 편지나 인용을 통해 당시 문명화된 20세기 유럽. 독일의 악몽 같았던 역사를 나열해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폭력에 가담하고 어떤 사람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주려했었고 어떤 사람들은 방관하며 물러나있기만 했다. 피해자들에게 소극적이지만 혐오감을 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자신의 노력이 미미함에 안타까워하던 이들도 있었다. 도움을 주려다 희생당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영원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역사 속에서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문명의 파괴자는 우리 스스로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Posted by Tony Kim :

사기본기

2009. 2. 23. 12:18 from BoOk/hIsToRy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열전, 세가, 표, 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근에 본기 번역본을 찾게되서 사보았다. 연달아 읽기는 뭐해서 다른 책 한권 읽고 다음에 세가를 사서 볼까 생각 중이다.

사기 본기는 인물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열전이나 세가와 달리 오제 때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 제왕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오제본기, 하본기, 은본기 등의 내용은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 집필이 되서인지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마치 삼국사기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드는데 진시황본기로부터는 사마천이 생존하던 시기와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유에서인지 상세하고도 치밀하게 기술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초한쟁패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본기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초한쟁패의 사서나 소설이 아무래도 진시황 말기로부터 시작되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전의 역사로부터 이해가 가능하게 되며 또한 한고조 이후의 여태후까지의 역사의 흐름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만큼 세세한 묘사는 아닐지라도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해준다. 열전의 내용을 다시 꺼내어 봐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사실 열전만을 볼 때는 역사적인 전후 관계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놓칠 수 있었던 의미들을 다시 곱씹어 볼 수도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의 우수함은 역사의 나열에 그치지않은 사마천의 문학성에 있지않나하는 생각이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비교를 하자면 삼국사기의 내용은 부끄러울 정도로 부실하다. 삼국사기의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그나마도 부족한 내용을 보면 작가의 역량 또한 영향을 미치지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 불어 구름 흩날리고
威加海內兮歸故鄕  위세가 해내에 떨쳐 고향에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하면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고향인 패현에 들러 잔치를 열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하였던 '대풍가'로 사기 내의 기록에 의하면 유방은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촌구석 건달 출신이었던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여 천자가 되었을 때의 감회를 이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사마천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기의 우수함을 논하는 자체가 사기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Tony Kim :

콘스탄티노플 함락

2007. 9. 17. 16:12 from BoOk/hIsToRy

 


전쟁

저자
시오노 나나미 지음
출판사
한길사 펴냄 | 2000-03-01 출간
카테고리
전쟁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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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비교

시오노 나나미의 글중에 전쟁 3부작이 있는데 그 시작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시작하고 있다. 사실 로마사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는 것도 없었는데 대우차에 있을때 기숙사에서 룸메이트가 사가지고 있던 로마인 이야기 2권을 읽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암튼 지금까지 나온 것까지는 다읽었고 이전에 비해서는 많은 것들을 알게되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로마의 이야기가 여기서 어떤 형식으로든 끝이 나게된다. 동로마제국이 지금의 이스탄불인 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동로마제국을 열고 한때는 로마 전성기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멸망 당시에는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세력이 위축되어 결국은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점령 당하여 역사에서 로마제국은 사라지게되고 만다.

 

시오노나나미의 이 책은 나머지 두편들이 그렇듯이 소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아무튼 중세가 이미 지나가기 시작해서 르네상스를 앞두던 시기였었고 자료는 충분하며 기록도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던 역사적인 사실이니 이야기 면면이 비록 소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픽션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에 참가한 인간군상들의 면목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읽는 사람이 몰입될 수있게 해주고 있다.

 

카톨릭이 아닌 그리스정교의 국가, 로마인의 나라라기보다 그리스의 국가 같았던 동로마는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의 국가에 의해 십자군 원정중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하기도 하면서 이미 도시국가 수준으로 세력이 위축되어있었고 그만큼이나 오래 국가를 유지한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큰 제국이 결국은 그렇게 없어지게되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연민과 안타까움이 같이 하게 마련이다. 선황때에 위기를 가까스로 외부적인 요인으로 모면하였을 때 좀더 방비를 하였더라면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이 원조에 좀 더 빨리 대응을 했었더라면 하다못해 마지막 공세때에 수비병이 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만 않았었더라면이라는 이야기들은 결국은 이런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생명도 백년을 넘기기 힘들고 지금까지의 그 수많은 제국들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았듯이 로마 또한 동방의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최후를 맞게된다. 오히려 우리가 행간에서 읽어야될 건 장거리포가 사용되는 쪽으로 이미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믿고 화려한 갑옷에 기사들을 고집하던 구세력이 헝가리의 신기술 장거리포를 동반하여 막강한 육군을 내세운 신세력에 의해서 멸망되는 것을 보아야되는 건 아닌가 싶다. 세상은 끊임없이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변한다.

Posted by Tony Kim :

우리 궁궐 이야기

2007. 8. 23. 16:05 from BoOk/hIsToRy

 

우리 궁궐 이야기
국내도서
저자 : 홍순민
출판 : 청년사 2005.06.13
상세보기

 

'우리 궁궐이야기'는 다른 이유보다는 너무 서울에 있는 궁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다는 생각에서 사서 보게 되었다. 지금은 화성에 살고 있지만 첫 직장을 창원에서 가지기 전까지는 군대 시절을 제외한 27년 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서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곤하는데 이 책도 그런 이유에서 사서 읽게되었다.

 

서울에 궁이 5개나 있었다는것을 그리고 그 각각의 궁의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고있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될까. 덕수궁이 원래는 경운궁이라는 것을 덕수라는 것은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일제로부터 굴욕적으로 받은 궁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이 책을 사서 보기 전에 경복궁에 한번 혼자 가 본 적이 있었다. 근정전은 대대적으로 수리중이고 총독부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있었었다.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의경들이 막고 선 문이 있는데 그 멀리 정말이지 멋있는 건물이 있었다. 그 멀리에서 봐도 칠이 벗겨지고 문에 창호지가 벗겨진 것이 보이지만 그래도 저런 건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건물이 집옥재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는 저런 건물들과 그리고 지금은 잔디밭으로 변했어도 한때는 궁녀들과 궁인들이 복작거렸을 경복궁과 경희궁 창경궁 창덕궁 경운궁을 책에서라도 더듬어 볼 수 있으면 좋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Tony Kim :

한국전쟁

2007. 6. 1. 11:37 from BoOk/hIsToRy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국내도서
저자 : 박태균(Park Tae Gyun)
출판 : 책과함께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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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에서 일어났던 찬탁과 반탁운동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같이 단순히 우익은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좌익은 처음의 반대에서 소련의 지시에 따라 찬탁으로 돌아선 과정이었을까?


책의 저자는 다른 방향에서 이해가 수도 있는 진실일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좌익이 지지했던 내용은 신탁통치라기 보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사항에 대한 찬성이었으며 모스크바 3 회의의 합의 내용 중에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으로 인해 이러한 해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신탁통치와 관련해서도 전적으로 한국민을 배제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사실상 과도기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하여 한국정치세력이 참여한 상황에서의 신탁통치였으므로 당시의 국민정서는 해방 직후여서 신탁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지만 일면 가장 현실적인 통합과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고 그런 이유로 좌익세력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을 지지한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좌익 측이 소련의 지시로 지지로 돌아섰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사실상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 이북에 진입한 소련으로서는 38 이북의 국내 정치 세력이 공산주의 일색이어서 굳이 신탁통치를 진행할 필요성이 없었다. 오히려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던 쪽은 38 이남의 통일되지 않은 정치세력들간의 분쟁으로 속이 타던 미국측이었으며 (당시의 이남 정치권은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 출신부터 미국측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여운형 등의 중도파 그리고 박헌영 등이 주도하는 남도당 계열까지 여러 세력이 나름대로의 세력을 가지고 세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측에 우호적인 세력을 키울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북침이나 북침 유도설이 맞는 이야기는 아닐까?


한국전쟁을 앞두고 당시 김구 등의 정적들이 사라지고 경재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화를 찾아가던 상태에서 이승만 정권은 입버릇처럼 북진을 부르짖고 있었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무력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남한 측이 섣부르게 북을 침공하는 오판을 일으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혹자들은 미군 철수는 한반도 남측의 일시적은 무력 공백현상을 만들어 공산진영의 오판을 초래시켜 전쟁을 유도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당시의 역사적 사료들과 미국과 한국의 현실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북침이나 남침 유도설에 대한 허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철수한 것은 소련이 철수함에 따라 이상 남한에 머무를 명분이 없어져서 부득이 하게 철수한 것에 불과하며 김일성과 스탈린간의 수차에 걸친 회의록과 서신 등을 통해 공산 진영의 판단 하에 전쟁이 발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밖에도 전쟁 당시 인민군은 쓸데없이 서울에서 일이나 되는 시간을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중국의 참전까지의 내부 논란과 참전으로 인해 중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인천상륙작전이 과연 전적으로 성공한 작전이었는지 한국전쟁은 3년이나 계속되었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휴전선쯤으로 전선이 형성되고 무엇 때문에 2년이나 전쟁이 계속되었는지 등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교과서의 피상적인 지식과 기존의 정권의 이해에 따라 생성된 왜곡된 지식들이 상당 부분 새로 알게 되거나 다시 알게 해주는 중요한 책인 같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견해의 차이는 있을 있겠지만 읽어보면 좋은 책이 아닐까?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