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이 아름다웠다고 누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게 추억이라고는 하지만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열등감을 떨쳐내려고 힘겨워하던 시기이자 진저리 나는 폭력에 시달리던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들어내고 돈을 요구하고, 가식적인 애정을 과시하는) 그나마 남아있던 좋은 기억들도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들게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교생선생님이 내가 너희들 나이라면 어쩌고 하면서 중학교 시절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라는 등등의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웃기는 소리다. 나이를 꺼꾸로 먹을 수도 없지만 다시 돌아간들 더 나아길거라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것은 어이없다. (지금 다시 대입시험 보면 그때보다 잘 볼 자신있나?)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미련은 보잘 것 없는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제이슨 테일러는 포틀랜드 전쟁이 일어나던 1982년 블랙스완그린이라는 작은 동네에 살고있는 13살 소년이다. 아마 69년이나 68년생일 것이고 나하고 비슷한 또래라서 책을 읽다보면 귀에 익은 팝송이나 가수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언제적 가수냐.. 도나 섬머) 제이슨은 정말 생생하게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고민거리를 안고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부모는 얼굴만 마주치면 으르렁대고, 누나는 히스테릭하다. 어느 순간 말더듬증까지 생겨 친구들에게 들킬까 안절부절하며, 딱히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남쪽으로 튀어’의 지로가 연상되는데 (하긴 그쪽 가족들은 대책없이 사이가 좋지만) 심각한 학교 폭력에 왕따까지 소설 중반부가 넘어가면 시달리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지긋지긋했던 너의 과거가 기억나지 않냐?’라고 작가가 옆에서 얘기하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긴 그렇다고 어른이 된 지금의 상황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냐만서도...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1980년대냐 2010년대냐를 떠나서 결국 생활은 지속적인 폭력으로부터의 저항과 자존감 쟁취의 연속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소설인 것 같다.
데이비드 미첼의 성장소설인 “블랙스완그린”은 분명 전작들의 독특한 구성과 다르게 완전히 평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전작들과 연관된 인물들은 역시나 나온다는 것. 제이슨을 집요하게 괴롭히다가 나중에 호된 반격을 받게되는 닐 브로즈는 미첼의 데뷔작 "유령이 쓴 책" ‘홍콩’ 편에 나오는 영국인 변호사였고, 교구목사의 부인인 정신 사나운 그웬돌린 벤딩크스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티머시가 갇히게 되었던 강제 요양원의 입주자 위원회 대표였었다. 상당히 비중있게 나왔던 마담 크롬린크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작곡가 비비언 에어스의 딸로 등장했었다. 여기서는 우아 그 자체인 노부인이 되어 제이슨에게 시와 불어를 가르쳐준다. 그녀와 제이슨이 로버트 프로비셔가 작곡한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를 듣는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작가는 다른 방식의 헤인 시리즈를 생각하는가 싶은 생각도 들게된다. (마담 크롬린크는 르 귄이 도대체 누구야?라는 식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