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구려사에서 태조대왕과 관련된 기사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조대왕은 유리왕(琉璃王)의 손자 중 한명으로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 물러난 모본왕을 이어 7세에 불과한 나이에 제위에 올랐습니다. 모본왕은 당대의 폭군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악행은 다했던 왕으로 보입니다. 이런 왕의 결말이 대부분 그러하듯 결국 제위 6년만에 측근에 의해 시해되고 맙니다. 이후 신하들이 모여 재사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재사가 끝끝내 고사하여 재사의 아들이었던 궁이 제위에 오르게됩니다. 태조대왕 제위 이후의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11살이었던 56년 (태조왕 4년) 동옥저를 합병한 것은 태조대왕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태후 섭정 때의 일로 추정되며 당시 강성했던 고구려의 역량에 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나이 20대인 68년과 72년에 고구려는 갈사국과 조나를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등 이 시기 본격적인 강국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삼국사기 기록이 그러하듯 태조대왕과 관련된 기록도 매우 단편적이고 부실하지만 이를 통해 태조왕은 치세 동안 인접한 후한을 괴롭히며 세력을 넓히고 안으로는 내치를 통해 안정을 꾀하면서 고구려는 비로서 국가다운 체계를 갖추어 나간 듯 합니다.
태조대왕은 우리 역사상 (기록이 정확하다면) 최장수에 최장기 군주로 기록될만합니다. 워낙에 이른 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도 했지만 아우인 수성에게 양위할 당시 제위에 오른지 94년째였으며 선왕으로 물러나서도 20년을 더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붕어 당시 임금의 나이는 119세였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100세에 양위를 하였으나 제위 71년부터 만약을 위해 양위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는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아우인 수성(遂成)이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태조대왕은 왜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하지 않았을까 의문도 들게됩니다. 차대왕 수성이 왕위에 등극한 것도 그의 나이 76이었을 때였습니다. 차대왕이 비록 20년이나 제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76세라면 지금으로도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알기 힘들지만 양위 당시 태조대왕의 아들들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측면이 고려되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우였던 수성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훗날 차대왕이 되는 수성은 태조대왕의 치세동안 눈부신 활약을 보입니다. 태조대왕 후기 후한과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수성의 활약으로 고구려는 수차례의 외침을 막아내었고, 유능한 장수이자 50대 후반의 노련한 황족이었던 수성은 80이 다가오는 시점의 태조대왕에게는 가장 검증된 후계자였을 것입니다. 황족이자 군사적 성과를 보인 수성이 이에 더해 만만치 않은 자체 세력까지 가졌다고 추측한다면 태조대왕으로서는 이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 또한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수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든든한 측근들과 무시할 수 없는 사병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수성도 또한 자연스럽게 대권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태조대왕의 비극은 그 자신이 너무 장수를 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정사에 정식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수성은 이제나저제나 태조대왕이 곧 죽거나, 아니면 기력이 다해 곧 자신에게 선위할 것으로 기대하였겠지만 그로부터도 십수년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자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아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긴박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94년(서기 146) 가을 7월, 수성이 왜산(倭山) 아래서 사냥하면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들어가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생각해보라.”
근신들이 모두 말했다.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혼자 나서서 말하였다.
“지난번에 왕자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왕자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수성이 말하였다.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과 침이 되는 것인데 어찌 의심하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 왕자께서는 비록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임금의 폐위를 위해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의 실로 만 균(鈞, 1균은 30근임)의 무게를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왕자의 선함을 깊이 아시어 반드시 왕자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불쾌하게 여겼다. 근신들은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연로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질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령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에 근심을 초래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해야 합니다.”
태조대왕 80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수성은 대왕께는 맏아들이 있는데 자신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겉으로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었습니다. 결국 자신 아니면 누가 왕이 되겠는냐는 자신감의 발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로부터도 십수년이 지나도록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려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친동생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국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등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별궁으로 물러납니다. 친족간의 상쟁은 피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양위 이후 태조대왕과 관련된 큰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즉위 다음해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고복장을 사사합니다. 그리고 즉위 3년째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이었던 막근마저 죽입니다. 그의 동생이었던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였던 고복장을 죽인 것은 왕조사회에서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힘겹게 왕위에 오른 왕들이 권력을 잡은 후 기존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진행하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선왕이 살아있는 중에 선왕의 큰 아들을 숙청하는 것은 고구려 초기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03세의 선왕은 한때 자신을 도와 고구려의 번영을 같이 이끌었던 아우가 자신의 측근 뿐만 아니라 친자식까지 죽이는 과정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요? 무려 94년을 제위에 있었던 태조대왕입니다. 고구려를 이만큼 발전시켰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죽지도 못하여 자신의 아들들이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것마저도 무기력하게 지켜보게만 되었습니다. 속절없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대왕 간 애증의 관계는 결국 차대왕 즉위 20년만에 차대왕의 종말로 마무리됩니다. 삼국사기는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20년(서기 165)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椽那)의 조의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임금을 시해하였다. 호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