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부인전

2014. 6. 17. 11:56 from FuN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로, 계보는 창랑씨(蒼筤氏)에서 나왔다. 그의 선조는 음률을 알았으므로 황제(黃帝)가 발탁하여 음악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우순(虞舜) 시대의 소(簫)도 바로 그의 후손이다.
창랑씨가 곤륜산(崑崙山) 북쪽에서 진방(震方 동방)으로 이주하였는데, 복희씨(伏羲氏) 시대에 이르러 위씨(韋氏)와 함께 문적(文籍)을 주관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자손들도 모두 가업을 지키면서 대대로 사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진(秦)나라가 포학하게 굴면서 이사(李斯)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책을 불사르고 유자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인 뒤부터 창랑씨의 후손도 차츰 쇠미해졌다.


그러다가 한(漢)나라 때에 와서 채륜(蔡倫)의 가객(家客) 중에 저생(楮生)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서 붓을 가지고 때때로 죽씨(竹氏)와 어울려 노닐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경박한 데다가 점차로 젖어들 듯한 참소를 잘하였는데, 죽씨의 강직한 성격을 미워한 나머지 남모르게 좀먹고 헐어서 마침내는 그 직임을 탈취하였다.


주(周)나라의 간(竿 낚싯대)도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과 함께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였는데, 태공이 갈고랑이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간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큰 낚시질을 할 때에는 갈고랑이 없이 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을 낚느냐 큰 것을 낚느냐 하는 것은 꼬부라진 갈고리를 매다느냐 매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갈고리 없는 낚시를 해야만 나라를 낚을 수 있지, 갈고리 있는 낚시를 하면 고작 물고기나 잡을 뿐이다.”라고 하니, 태공이 따랐다. 그 뒤에 과연 태공이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나라에 봉해졌는데, 간을 유능하다고 천거하여 위수 가 즉 위빈(渭濱)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죽씨가 위빈에서 일어나게 된 유래이다.


지금도 그곳에 거하는 자손이 여전히 많으니, 예컨대 임(箖)ㆍ어(箊)ㆍ군(䇹)ㆍ정(筳)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양주(楊州)로 옮긴 자들은 소(篠)와 탕(簜)이라고 칭해지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들은 봉(篷)이라고 칭해진다. 죽씨는 대개 재능 면에서 문(文)과 무(武)의 두 갈래로 분류되는데, 대대로 변(籩)ㆍ궤(簋)ㆍ생(笙)ㆍ우(竽) 등 예악에 쓰이는 것들로부터 짐승을 쏘고 물고기를 잡는 미세한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적에 실려 있어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만 감(䇞)의 경우만은 성품이 우둔하기 그지없어서 속이 꽉 막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리고 운(篔)의 시대에 와서는 숨어 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동생 하나가 있어서 이름을 당(簹)이라고 하였는데, 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속을 텅 비우고 자신을 바르게 유지하며 왕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내니, 자유가 “하루도 차군(此君)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므로 차군이 그대로 그의 호가 되었다. 대저 자유는 단정한 사람이니, 자기의 벗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품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당은 익모(益母)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니, 이 딸이 바로 부인이다. 처녀 시절부터 그 자태가 정숙하였는데,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탕한 말을 지어내어 집적거리며 유혹하자, 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해도 절조를 지켜야 하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한번 남에게 그 절조가 꺾인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다시 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의생(宜生)이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어찌 소를 끌고 다니는 무리가 부인을 감히 넘볼 수나 있었겠는가. 부인이 장성하고 나서 송 대부(松大夫)가 예의를 갖춰 청혼을 하니, 부인의 부모가 말하기를 “송공(松公)은 군자다운 사람으로서 그 고상한 절조가 우리 가풍과 서로 대등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 뒤로 부인은 날이 갈수록 성품이 더욱 굳세고 두터워졌다. 간혹 일을 당하여 분변할 적에는 마치 칼을 대는 대로 쪼개지듯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였을 뿐 매선(梅仙)의 서신이 있거나 이씨(李氏)의 무언의 기대에도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귤 노인이나 살구 아이의 청탁을 들어줄 리 있었겠는가. 간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에 바람을 만나 읊조리고 비를 만나 휘파람 불 적에는 산뜻하고 말쑥한 그 자태를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호사가들이 그 모습을 살짝 화폭에 담아 보배로 전하곤 하였는데, 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 같은 사람은 더욱 이를 좋아하였다.


송공(松公)은 부인보다 나이가 18세 위였는데, 만년에 신선술을 배우더니 곡성산(穀城山)에서 노닐다가 돌로 몸을 바꾸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몸으로 살면서 왕왕 위풍(衛風)의 시를 노래 부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마구 흔들려서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성품인지라, 사관이 정확한 연대는 잊어버렸지만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긴 뒤로 술에 마냥 취한 끝에 고갈증(枯渴症)에 걸려 마침내 치료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병에 걸린 뒤로는 사람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만년에 들어 절조가 더욱 굳었으므로 향리의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부인과 동성(同姓)인 삼방 절도사(三邦節度使) 유균(惟箘)이 부인의 행실에 대해서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조정에서 절부의 호를 내렸다.


사씨(史氏)는 말한다. 죽씨(竹氏)의 선조는 상세(上世)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모두 재능을 발휘하며 절조를 고수하여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러니 부인이 현덕을 소유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아, 부인이 이미 군자의 배필이 된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기특하게 여겨졌는데도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무지하다는 탄식의 말이 어찌 근거 없이 나온 것이라고 하겠는가.

 

※ 가정집 제1권 잡저 中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