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之不見 名曰夷 시지불견 명왈이
聽之不聞 名曰希 청지불문 명왈희
搏之不得 名曰微 박지부득 명왈미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其上不皦 其下不昧 기상불교 기하불매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시위무상지상 무상지상 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能知古始 是謂道紀 능지고시 시위도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현상인지 파악하기조차 힘든 경우죠. 말 그대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상황입니다. (夷, 希, 微라는 단어로 각 상황에 명칭을 다는 것은 뭐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 현상만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고민한다고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현상을 관찰만 한다고 이해가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此三者 不可致詰) 노자는 이러한 상황을 일반적인 논리와 질서가 적용되지않은 혼돈 상황으로 묘사합니다. 뭐 위라서 밝고, 아래라서 어두운 것도 아니며 (其上不皦 其下不昧) 실타래가 꼬이듯 뒤엉켜 있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거죠. 그야말로 無物, 물리적 분석이나 이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그 다음 문장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고, 형상도 이해가 안되어 그냥 흐릿하게 그러한 문제 또는 현상이 있다는 것만을 볼 수 있다는 거죠.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다가오는 것 같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도 그 뒤를 볼 수 없다고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하는 이야기도 결국은 문제의 실마리나 선후 관계를 알 수 없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전대미문의 문제를 마주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될까요? 노자는 기존의 해결책들을 우선 뒤져 당면한 문제에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검토해보라고 합니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익히 알고 있는 예전 해결방식을 사용해서 시작하는 것이 (能知古始) 새로운 문제 해결책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是謂道紀)
사실 이 마지막 두문장의 내용은 다소 읽는 사람에 따라 맥빠지는 결론일 수도 있습니다. 막막한 문제를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전에 이미 답 나와있을꺼야, 잘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고민도 안하고 쉽게 말하는 해결책처럼 보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뭐 꼭 그럴까요?)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수천년 전 어느 원시 부족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나섰다고 해봅시다. 뭐 이유야 여러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기존 거주지가 황폐해져서일 수도 있고, 침략자를 피한 것일 수도 있고….. 암튼 익숙했던 보금자리를 그렇게 떠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섰을 사람들에게 지나치거나 잠시라도 머물러야했던 야생의 공간은 그야말로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디서 갑자기 맹수가 튀어나올지 모르겠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될 수도 있었겠죠.
아무튼 이동이 불가능하다던지, 더 이상 찾아다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이들은 당시 도착한 장소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야했을 것 입니다. 막막하고 낮설기만한 이 혼돈의 장소에서 이 부족들이 해야될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마을을 재현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나무를 베어내고, 울타리를 만들고, 임시로라도 거처할 숙소를 만들고, 언젠가는 갖추어야할 시설들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하지만 환경이 달라져서 이전과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전에 필요없었던 난방에 대해 고민을 해야될 수도 있고, 습한 지대에 대한 보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시작은 유사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미 적용했었던 해결책을 우선 적용해보고 거기에 맞지않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고민해보는 것이 효율적인 접근법일 수 있습니다.
기수립된 방안 중 어느것이라도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紀)를 제공한다면, 그중 가장 나은 방법을 사용하여 우선 대응하고 모자란 부분에 대한 개선을 찾도록 하자는 것이 노자의 제안입니다.
보려하여도 보이지않는 경우를 가르켜 까마득하다 한다 (夷)
들으려해도 들리지않는 경우를 가르켜 희미하다고 한다 (希)
잡으로해도 쥐지못하는 경우를 가르켜 미세하다고 한다 (微)
사람들은 이런 경우 상황을 세밀하게 이해하기 힘드니 구분이 어려운 혼돈상황이기 때문이다.
위가 밝은 것도 아래가 어두운 것도 아니다.
규정하기 힘들도록 꼬여있으며, 파악이 안되어 이해할 수 없다.
상태나 형상이 없는 듯하니 이런 상황에 사람들은 그저 당황스럽고 정신이 아득할 뿐이다.
맞이하여도 그 앞을 볼 수 없고, 뒤따라도 그 뒷면을 볼 수 없다.
이 경우 예전의 방안을 채택하여 지금의 문제를 다스려도록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옛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