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有道 走馬以糞

천하유도 극주마이분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무도 융마생어교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화막대어부지족 구막대어욕득

故知足之足 常足矣

고지족지족 상족의

 

 

天下有道 走馬以糞

천하에 도가 있으면, 놀고 있는 땅에서 거름을 이고 말이 뛰어다닌다.”

 

이 행에는 郤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해석해야될지 애매하더군요. 한자 사전에 주로 '틈', '구멍' 등의 의미로 나와있는데, ‘놀리고 있는 땅’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을 확인하여 위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성 밖에 살게된다.”

 

첫 문구에 댓구가 되는 내용입니다. 군마가 성 밖에 산다는 것은 나라 밖 전쟁터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의 내용과 묶어 이야기하면 그 사회에 道가 있냐 없냐에 따라, 같은 도구라도 (여기서는 말로 예시를 드는데)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 사용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약탈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이야기합니다.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할 수도 있지만, 원하는 바를 가진 상대를 겁박하여 약탈하는 것도 방도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켜 수확을 높이자는 방법과, 아니야 상대가 가진 것을 약탈하여 단기간에 창고를 채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라고 선택하는 차이는 어디서 발생되는 것일까요?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만족함을 모르게 되면 화가 막대해지며, 얻고자하는 욕심이 재앙을 막대하게 한다.”

 

노자는 여기서 만족함을 모르고 욕심을 내는 것이 그 시작점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행과 재앙을 매우 크게 키우게된다 이야기합니다.

 

故知足之足 常足矣  

이러한 이유로 만족함을 아는데에서 비롯되는 만족, 이것이 지속 가능한 만족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만족함이라는 의미는 이쯤에서 대충 그만 두자, 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더 라며 결국은 상대방을 약탈하는 행위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어디까지 추진을 하고, 어디에서 멈출지를 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욕심과 욕망은 객관적인 판단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배제하여야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고요. 

 

첫줄의 퇴비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예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도덕경이 강조하려 한다면 굳이 퇴비를 써서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행위도 부질없는 짓일 겁니다. 결국 아무 노력도 하지말자는 것은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약탈과 살육으로 이어지는 것은 무도한, 즉 대안조차도 될 수 없는, 고려해서는 안되는 행위라로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로 들어서면 이건 순수한 개선활동이 아닌 욕심과 욕망에 휘둘리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욕심을 내지말고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하여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한도 내에서 추구하는 개선활동이야 말로 "常" 즉 지속가능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5장

2024. 3. 18. 13:48 from BoOk/pHiLoSoPhY

大成若缺 其用不弊

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躁勝寒 靜勝熱

조승한 정승열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大成若缺 其用不弊

큰 성과물은 무언가 흠이 있어 보이지만, 그 쓰임에 나쁨이 없다.”

 

아래 이어지는 글들도 비슷한 의미로 보이는데, 이 문구는 조금 풀어서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두루 사용될 제품이나 제도를 만들려면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그 제품이나 제도를 이용하는 User들에게 나름의 융통성을 부릴 수 있는 Room을 주여야 그 쓰임이 더 커지게 된다.”

 

Platform이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PC의 윈도우나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 / IOS는 그 자체만으로는 활용할 수 있는 용도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토대를 마련해주는 운영체계는 막강한 확장성을 발휘합니다. 다른 개발자들이 Platform에 기꺼히 참가하여 새로운 앱을 만들어내고, 또 그 앱을 유저들이 사용하며 점점 그 Platform의 활용도를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거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하겠다고 해서는 그 쓰임새가 지금보다는 훨씬 한정적일 겁니다.

 

이와 같이 무언가 정말 크게 쓰이려면, 그리고 큰 활용을 기대한다면, 나 혼자 또는 우리 회사나 조직 혼자서 모든 것을 완전무결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부터 재고해야되지 않을까요? 얼핏 보기에는 빈틈으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사람들이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참여하고 싶도록 유도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그 쓰임이 여러 사람의 참여에 의한 것이어서 오히려 폐단이 발생될 가능성을 줄여줄 수도 있지않을까요?

 

大盈若沖 其用不窮

크게 채움은 빈 것처럼 보이나 그 쓰임에 끝이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 내가 채워놓았다고 훌륭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나는 그 아이디어들을 담을 그릇과 방향을 알려주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이 그리고 노력들이 담겨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충만함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한계가 없게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월트디즈니의 Mission인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The mission of The Walt Disney Company to entertain, inform and inspire people around the globe through the power of unparalleled storytelling, reflecting the iconic brands, creative minds and innovative technologies that make ours the world's premier entertainment company

월트디즈니 컴퍼니의 미션은 비할데 없는 스토리텔링, 상징적인 브랜드의 반영, 창조적인 마인드와 혁신적 기술의 힘을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정보 그리고 영감을 제공함으로서 우리를 세계 최우수 엔터테인 컴퍼니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였는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읽다보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듯합니다. 

반면에 넷플릭스의 Mission은 아래와 같이 간결합니다. 

 

Netflix, Inc's coporate mission is "To entertain the world." 

넥플릭스 주식회사의 미션은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무언가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욕심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좋은 말 많이 가져다 붙인다고 훌륭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맥락없는 설명의 과잉은 결국 아무 방향도 제시 못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큰 그림에서 바로 가려는 행위는 굽어보이기도 하고, 큰 그림에서 완성도를 높이려는 행위는 졸렬하게도 보이며, 큰 주제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말주변이 어늘해보이지도 한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躁勝寒 靜勝熱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며, 더위를 이기려면 움직임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그러면 위와 같이 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경우에 다 맞는 해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Case by Case. 즉, 상황에 맞는 대처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울 때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몸에 열을 내야합니다. 안그러면 얼어죽기 십상이죠. 반대로 더울 때는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됩니다. 땡볕 밑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는 왠만한 사람들은 더위 먹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큰 방향성은 제시를 하되, 너무 말단의 영역까지 숨 막히게 해야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은 피해야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장의 융통성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淸靜爲天下正

맑고 차분함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단, 이 모든 것은 투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맑은 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납득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군가 특정 대상이나 인물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는 기준이라고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된다 이야기합니다. 淸淨에서 이야기 하고자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4장

2024. 2. 21. 13:51 from BoOk/pHiLoSoPhY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명여신숙친 신여화숙다

得與亡孰病

득여망숙병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현상을 정의하는 것과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 중 무엇을 더 가까이 해야겠는가? 실체를 파악하는 것과 이익을 확보하는 것 중 어떤 것에 비중을 더 두어야겠는가?”

 

44장에서 다루는 주요 화두는 名과 身, 그리고 貨 세 가지입니다.

 

名에 대해서는 도덕경 1장에서 다루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名可名 非常名) 名은 지금까지 규정되지 않았던 현상을 증명하는, 즉 정의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F=m*a라는 물리법칙은 이때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힘의 크기를 수식으로 규정한 행위입니다. 즉 “名” 현상을 정의하는 행위라고 보면 되죠. 이러한 "名"의 행위는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던 것을 알아내는 행위죠. 우리가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냈을 때 세상에 없던 수소가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었던 것처럼요. 

 

그러면 身 즉 몸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저는 현상의 본질을 가르키는 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의 名의 행위는 현상을 완벽하게 정의하지는 못합니다.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지향점 등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여 규정하기도 하고, 가용한 자원의 한계로 인해 일부만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현상을 규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의 활동 한계로 인해 이후 보완과 수정의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앞에 언급하였으니 수소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이를테면 수소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아낸 사람들도 수소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있는가를 몰랐을 수 있습니다. 단지 수소의 특징은 이러고 저러고 하다는 정도에 그쳤을 수 있죠. 전자 한개와 양성자 한개로 구성된 수소의 구조를 알아낸 다음에도 그러면 그 양성자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자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두 개의 전자와 양성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하고 변화하는지 처음부터 알고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수소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처음에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낸 것이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그 이유로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요? 

 

貨. 위의 이유로 비용에 대한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 즉 이러한 규정을 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즉 한정된 자원을 감안해야되며 또한 어떤 행위가 과연 실익이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세상의 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일까요? 단기적이냐 중장기적이냐의 차이일 뿐 대부분은 사회에 이익이 될 법인 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익이 단순히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더 편한 또는 안전한 환경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지 즉 공리에 기여하는지를 감안하는 것도 모두 이익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名與身孰親, 즉 이 문장은 단순히 둘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추진 중인 행위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본질을 모두 규명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연구가 가장 Ideal 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의 제약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완벽한 본질의 규명은 어렵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身與貨孰多,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활동에 대한 비용을 생각해야되고,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실익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행위도 기대효과 없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위를 왜 열을 내면서 하겠습니까?

 

得與亡孰病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병이 될 것인가”

 

흔히들 과유불급 (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쯤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은 전체적인 면을 생각해야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Total Cost 측면을 감안해야 되는거죠. 양쪽의 상충되는 가치에 대해 어느 쪽을 어 두텁게 하고 어느 쪽을 비울지는 한정된 자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리고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더 얻는 것을 추진해야되는가, 아니면 이쯤에서 조금 손실을 보더라도 추진하던 것을 잠간 멈추는 것이 맞는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돌이켜 보고, 이름을 얻기 위해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익을 탐하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상을 찾다가 명분도 이익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된다는 거죠.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이런 이유로 집착에는 큰 비용이 뒤따르고, 쌓아두기만 해서는 추후 이것이 손실이 커질 수 있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어느 수준이 충분한지를 알면 욕됨이 없을 것이며, 어디서 멈춰야될지를 알면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가히 오래갈 수 있다.”

 

다시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44장은 치우침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론도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활동 및 노력과 투자 그리고 연구의 과정 중 여러 순간마다 과연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괜찮은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