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47장

2024. 5. 10. 15:23 from BoOk/pHiLoSoPhY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불출호지천하 불규유견천도

其出彌遠 其知彌少

기출미원 기지미소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시이성인 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집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에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으며, 창 밖을 보지 않아도 천하의 도를 통찰할 수 있다.”

 

이번 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같은 취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꼭 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또 내가 해봤다고 그게 꼭 맞으라는 법도 없으며, 그게 전부일 가능성도 낮습니다. 결국 이건 앞의 장에서 강조되던 리더가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其出彌遠 其知彌少

두루 멀리 나아가면 두루 적게 알게된다.”

 

이 또한 위의 문구와 비슷한 의미로 읽힙니다. 혼자 다 알아보겠다고 여기저기 직접 가서보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한계가 있어 상황 파악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이런 이유로 성인은 직접 행하지 않도록 알 수 있으며, 직접 보지 않아도 규정할 수 있으며, 무언가 의도를 가지지 않더라도 이룰 수 있다.”

 

마지막 줄에서 노자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저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전체적으로 노자도덕경은 표현의 간결함 때문에 (다른 의미로는 쉽게 풀어쓰지 않고 많은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에) 숨은 의미를 그리고 구태여 말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으면 내용 전체를 오독할 수 있는 위험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학습의 불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경험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경험과 학습이 없다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으며 다른 사람들의 허황된 이야기에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학습과 경험의 쓸모없음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청과 정확한 자기 객관화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직의 리더라면 여기에 더해 모든 Process의 시스템화 및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포진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추가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내가 무언가를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그리고 일일히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수장이 이웃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위해 직접 그곳에 가서 곳곳을 방문한들 현상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나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종 본인이 정작 할 일은 뒷전이고, 엉뚱한 곳에 참견하며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은 종종 보곤 합니다.

 

첫번째 문장의 “문 밖을 나서지 않고…. 창 밖을 엿보지 않고…”라는 문장은 이런 경우를 비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리더가 정작해야되는 것은 知, 名, 成. 즉 무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여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이번 장에서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天下有道 走馬以糞

천하유도 극주마이분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무도 융마생어교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화막대어부지족 구막대어욕득

故知足之足 常足矣

고지족지족 상족의

 

 

天下有道 走馬以糞

천하에 도가 있으면, 놀고 있는 땅에서 거름을 이고 말이 뛰어다닌다.”

 

이 행에는 郤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해석해야될지 애매하더군요. 한자 사전에 주로 '틈', '구멍' 등의 의미로 나와있는데, ‘놀리고 있는 땅’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을 확인하여 위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성 밖에 살게된다.”

 

첫 문구에 댓구가 되는 내용입니다. 군마가 성 밖에 산다는 것은 나라 밖 전쟁터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의 내용과 묶어 이야기하면 그 사회에 道가 있냐 없냐에 따라, 같은 도구라도 (여기서는 말로 예시를 드는데)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 사용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약탈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이야기합니다.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할 수도 있지만, 원하는 바를 가진 상대를 겁박하여 약탈하는 것도 방도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켜 수확을 높이자는 방법과, 아니야 상대가 가진 것을 약탈하여 단기간에 창고를 채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라고 선택하는 차이는 어디서 발생되는 것일까요?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만족함을 모르게 되면 화가 막대해지며, 얻고자하는 욕심이 재앙을 막대하게 한다.”

 

노자는 여기서 만족함을 모르고 욕심을 내는 것이 그 시작점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행과 재앙을 매우 크게 키우게된다 이야기합니다.

 

故知足之足 常足矣  

이러한 이유로 만족함을 아는데에서 비롯되는 만족, 이것이 지속 가능한 만족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만족함이라는 의미는 이쯤에서 대충 그만 두자, 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더 라며 결국은 상대방을 약탈하는 행위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어디까지 추진을 하고, 어디에서 멈출지를 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욕심과 욕망은 객관적인 판단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배제하여야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고요. 

 

첫줄의 퇴비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예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도덕경이 강조하려 한다면 굳이 퇴비를 써서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행위도 부질없는 짓일 겁니다. 결국 아무 노력도 하지말자는 것은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약탈과 살육으로 이어지는 것은 무도한, 즉 대안조차도 될 수 없는, 고려해서는 안되는 행위라로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로 들어서면 이건 순수한 개선활동이 아닌 욕심과 욕망에 휘둘리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욕심을 내지말고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하여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한도 내에서 추구하는 개선활동이야 말로 "常" 즉 지속가능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5장

2024. 3. 18. 13:48 from BoOk/pHiLoSoPhY

大成若缺 其用不弊

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躁勝寒 靜勝熱

조승한 정승열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大成若缺 其用不弊

큰 성과물은 무언가 흠이 있어 보이지만, 그 쓰임에 나쁨이 없다.”

 

아래 이어지는 글들도 비슷한 의미로 보이는데, 이 문구는 조금 풀어서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두루 사용될 제품이나 제도를 만들려면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그 제품이나 제도를 이용하는 User들에게 나름의 융통성을 부릴 수 있는 Room을 주여야 그 쓰임이 더 커지게 된다.”

 

Platform이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PC의 윈도우나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 / IOS는 그 자체만으로는 활용할 수 있는 용도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토대를 마련해주는 운영체계는 막강한 확장성을 발휘합니다. 다른 개발자들이 Platform에 기꺼히 참가하여 새로운 앱을 만들어내고, 또 그 앱을 유저들이 사용하며 점점 그 Platform의 활용도를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거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하겠다고 해서는 그 쓰임새가 지금보다는 훨씬 한정적일 겁니다.

 

이와 같이 무언가 정말 크게 쓰이려면, 그리고 큰 활용을 기대한다면, 나 혼자 또는 우리 회사나 조직 혼자서 모든 것을 완전무결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부터 재고해야되지 않을까요? 얼핏 보기에는 빈틈으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사람들이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참여하고 싶도록 유도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그 쓰임이 여러 사람의 참여에 의한 것이어서 오히려 폐단이 발생될 가능성을 줄여줄 수도 있지않을까요?

 

大盈若沖 其用不窮

크게 채움은 빈 것처럼 보이나 그 쓰임에 끝이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 내가 채워놓았다고 훌륭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나는 그 아이디어들을 담을 그릇과 방향을 알려주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이 그리고 노력들이 담겨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충만함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한계가 없게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월트디즈니의 Mission인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The mission of The Walt Disney Company to entertain, inform and inspire people around the globe through the power of unparalleled storytelling, reflecting the iconic brands, creative minds and innovative technologies that make ours the world's premier entertainment company

월트디즈니 컴퍼니의 미션은 비할데 없는 스토리텔링, 상징적인 브랜드의 반영, 창조적인 마인드와 혁신적 기술의 힘을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정보 그리고 영감을 제공함으로서 우리를 세계 최우수 엔터테인 컴퍼니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였는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읽다보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듯합니다. 

반면에 넷플릭스의 Mission은 아래와 같이 간결합니다. 

 

Netflix, Inc's coporate mission is "To entertain the world." 

넥플릭스 주식회사의 미션은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무언가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욕심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좋은 말 많이 가져다 붙인다고 훌륭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맥락없는 설명의 과잉은 결국 아무 방향도 제시 못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큰 그림에서 바로 가려는 행위는 굽어보이기도 하고, 큰 그림에서 완성도를 높이려는 행위는 졸렬하게도 보이며, 큰 주제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말주변이 어늘해보이지도 한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躁勝寒 靜勝熱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며, 더위를 이기려면 움직임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그러면 위와 같이 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경우에 다 맞는 해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Case by Case. 즉, 상황에 맞는 대처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울 때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몸에 열을 내야합니다. 안그러면 얼어죽기 십상이죠. 반대로 더울 때는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야됩니다. 땡볕 밑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는 왠만한 사람들은 더위 먹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큰 방향성은 제시를 하되, 너무 말단의 영역까지 숨 막히게 해야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은 피해야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장의 융통성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淸靜爲天下正

맑고 차분함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단, 이 모든 것은 투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맑은 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납득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군가 특정 대상이나 인물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는 기준이라고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된다 이야기합니다. 淸淨에서 이야기 하고자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