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2015. 9. 14. 10:57 from MoViE

대학 3학년때 교양으로 반학기 동안 중급 영어회화를 들었었습니다. 한 열 몇명 되는 사람들과 같이 강의를 들었었는데 거의 일정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애인이 자신 이외에 성경험이 있었던 편이 좋은가 아니면 없었던 편이 좋은 가하는 것이 토론의 주제였는데 아마도 강사는 (당시는 교수님이라고 했죠들..) 정말 미국인의 정서에서 성경험이 없으면 숙맥이고 매력도 없고 등등..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토론은 강사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영어가 자신이 없어서 거의 입을 닫고있던 학우들도 (주로 남학생) 열을 내면서 의사를 개진했는데 남학생들의 의견은 요약하자면 여자는 혼전 순결을 유지해야되고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라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여학생들도 발끈했었죠. 어떤 여학생은 남자들은 별 이상한 짓을 다하면서 여자들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것은 위선이고 역겹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 나는게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가 알고보니 전에 경험이 있었다고 헤어질 수는 없는거 아니냐고 말을 하자 한 남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면서 그러면 다른 남자랑 잤던 여자랑 아무렇지 않게 계속 사귈 수 있냐고 반문하더군요.
 
생각해보면 성(性)을 선악과 결부시키는 것은 캐캐묵은 듯하지만 아직도 진행 중인 논란거리인 듯 합니다.
 
영화는 1차대전 이후인 1921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전쟁 중에 눈 앞에서 부모가 군인들에게 참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이민을 하려 미국을 찾은 에바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집니다. 동생은 입국심사에서 결핵이 들통나서 격리되고 자신은 이민선에서의 불미스런 일로 인해 강제 추방될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브루노라는 남자가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입국심사관들에게 뇌물을 써서 그녀를 빼돌리고는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동생도 입국시킬 수 있을거라며 그녀를 안심시킵니다. 잠자리를 제공하고 일자리도 마련해주겠다고 안심시킵니다. 하지만 세상에 조건 없는 도움이란 없는 법이죠. 실상 포주였던 브루노는 에바에게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돈을 벌어야되지 않겠냐며 그녀를 매춘의 길로 몰아넣습니다.
 
영화 중간에 에바는 브루노에게 벗어나 뉴욕에 도착하면 찾으려던 이모의 집으로 탈출합니다. 하지만 이모부의 신고로 에바는 밀입국자 신세가 되어 격리 당합니다. 에바의 이모부가 그녀가 경찰에게 연행되는 순간 그녀가 배에서 몸을 더럽혔다며 가문의 수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여인들은 마을에서 왜놈에게 몸 팔다 온 창녀라며 멸시당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에게 강간 당하고 끌려갔다 탈출한 여인들은 화냥년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약한 여인으로서 살기위해 에바는 막다른 골목에서 몸을 써서 돈을 벌었습니다. 폐허가 된 나라를 떠나 동생과 같이 새로운 삶을 찾으려 탔던 짐승우리 같던 배에서 강간당했습니다. 나라가, 공동체가, 집안이 지켜주지 못해서 그녀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점령군의 병사들에게 강간 당했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왜 손가락질 받아야할까요? 왜 교회에서 에바는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거라며 자책할까요?
 
영화를 보며 어떠한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악을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만신창이가 되어 브루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You are not nothing.”이라고 말하던 순간 어느 영화의 여주인공이 이렇듯 아름답게 한 남자를 보듬어 안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햇살이 맑고 가을이 어느덧 다가오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동 개혁 좋아하시네

2015. 8. 7. 17:13 from MeDiTaTiOn

이 정권은 정말 Framing의 천재들인 것 같다. 그리고 언론들도 그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게 논점을 맞추면서 정권의 논리를 합리화 시켜준다. 급식 논란 때도 그랬다. 전체 복지 규모나, 복지 비용의 사용 적정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없이 급식비로 논점을 한정해서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수준이며, 부자들도 공짜로 먹는 그 급식비용이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더 좋은 쪽에 쓸 수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댔다. (정말 우리가 복지가 넘쳐서 포퓰리즘을 걱정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복지 예산 비중은 7.5% OECD 평균 19.3%에 훨씬 못 미친다. 복지 후진국인 미국도 16%가 넘는다.) 노동 유연성이라고? 우리나라 고용 안정성이 OECD 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몰라서 저러는 건가? (평균 근속년수로 보는 고용 안정성은 OECD에서 당당히 꼴찌다.) 공무원 연금 관련해서도 그렇고, 작금의 소위 노동시장 4대개혁 운운하는 것도 결국은 양질의 일자리를 줄이는 것에만 Focus를 맞추고 있다. 연장자들이 희생해서 젊은이의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된다느니, 미래 세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연금 규모를 줄여야한다느니. (정말로 해고를 쉽게 하면 청년 일자리가 늘어날거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주신다.) 무슨 以夷制夷도 아니고 이러면서 중산층 내에서 서로 싸우게 논점을 꾸며낸다. 꼼짝없이 40, 50대는 집단 이기주의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을 저해하는 악덕집단으로 매도된다.이러시는 와중에 내수 진작을 위해 명품가방이나 귀금속 세금은 덜내게 해주신다니...

 

암튼 정말계속 이러셔도 되는건가

Posted by Tony Kim :

비잔티움 연대기

2015. 7. 22. 15:31 from BoOk/hIsToRy

 


비잔티움 연대기

저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출판사
바다출판사 | 2007-04-1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한 지중해의 보석 이스탄불. 동서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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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렇게 좋은 책을 찾아 읽게도 됩니다. Soft Cover로는 6, 하드커버로 3권에 달하는 이 책을 작년 말 사전지식 없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들어 읽게되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에 ‘고대에서 봉건제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이 경제/사회학적 분석 위주라면 ‘비잔티움 연대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마치 긴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로마제국은 최전성기를 지나 방대해진 제국의 영토를 한 사람의 황제가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지게되자 제국의 영역을 작게는 둘, 많게는 넷까지 정제와 부제가 나누어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현재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시작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에 의해 패망하기 전까지 1,100년의 넘는 기간을 유럽 역사의 한 축으로 시대를 영위했습니다. (그야말로 천년 제국이죠.)

 

암흑기라고 표현하던, 어떻게 이해되던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이 봉건주의 체제로 이행되는 와중에도 동로마 제국은 유럽 동편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주의 국가 체계를 유지합니다.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체제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로마제국은 전체 유럽 입장에서 보면 동방의 침략에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기독교 승인으로 이후 유럽 경제, 문화, 군사 모든 면에 큰 영향을 줍니다.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거의 로마 제국 시기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만지케르트 패전과 십자군 전쟁의 타격으로 이후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눈을 뽑아 실명시키는 잔혹한 형벌, 환관과 왕실의 암투, 암살에 이은 찬탈과 같은 자극적인 측면도 있다지만 동서간의 종교 갈등, 동방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등 저자는 다각적인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큰 축이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와 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사라고 한다면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제국의 한 축으로서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이며 충분히 중요한 서양사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동로마사가 평가 절하된 것은 현재 동로마제국 영역이 이슬람권인 점, 역사학계의 주류가 서유럽 위주였던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겠죠.

 

사람들 이름이 다 비슷해서 상당히 헥갈리기는 했지만 이런 훌륭한 책이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