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2장

2018. 11. 22. 17:21 from BoOk/pHiLoSoPhY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첫장에서 道와 名에 대해 우선 화두를 던지고 名에 대해 주로 이야기 하였다면, 두번째 장은 名을 부여하는 의미와 道에 대해 운을 때는 듯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첫 두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이 두 문장은 얼핏 보았을 때는 爲美와 爲善이라는 문구가 있어 꾸미고 위선을 행하는 것이 추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아래의 내용과도 흐름이 어색하고 첫장의 내용과도 갑자기 방향이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죠. 오히려 이 두 문장은 사람들이 대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또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추하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선하게 하려한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의 문구들이 전반적으로 대립되는 명제가 사실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의미의 설명으로 연결되는 것도 그렇고 성인이 무언가를 행하고 이루어낸다는 말을 감안하여도 아무것도 하지말아라라는 설명은 좀 앞뒤가 않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앞에 장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첫단계 성격이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개념을 정하고 나면 상대되는 추하다는 개념도 성립될 것이고 착하다는 개념이 성립되면 반대되는 선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규정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사람들이 개선의 대상을 명확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후 어떤 방식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게되는 것이죠. 


풀어서 이 두 문구를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려한다

또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만들려 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글자는 "皆"자 입니다. 노자는 절대선이나 절대미, 이를테면 이데아적인 대상을 규정하고 사람들이 이를 추구해야된다는 당위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전반적으로 알려진 규정이나 관습에 따라 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는 현상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추한 것이 있으면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꾸미려 하고, 모두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하게 고치려 한다는 거죠.


영구불변의 선이나 미의 기준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발전이 없습니다. 오늘 이 방향으로 개선을 하고 내일 다시 고민하여 다른 방식으로 추가 혹은 근본적인 개선을 꾀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은 어떤 특정 엘리트 집단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구성원의 전반적인 합의와 공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노자는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우선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앞에 문장에 이어서 대립되는 대상들을 몇몇 열거하여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有와 無가 서로 상생하는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고, 어려움과 쉬움이 상호 보완관계에서 성립되고, 길고 짧음이 있어 비교를 할 수 있으며, 높고 낮음이 있어 경사가 이루어지며, 음악과 목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가 있어 순서를 정해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길게 얘기할 내용은 저로서는 없네요.)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의 두 문장은 聖人 즉 본보기로 삼아야할 사람들이 어떻게 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문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머무를 處'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되는지가 다소 어려움이 있는데요, 앞의 내용등을 감안하면 상식적인,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자리를 둔다, 선택한다 정도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이에 자기 주장을 억지로 고집하지 않으며, 남들을 가르킴에 있어서도 장황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교화한다."


다소 모순적일 수 있는 것은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될 만한 聖人을 노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방법일 수도 있고, 또한 관습적으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였을 수도 있지만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상대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노자에서 절대 기준의 대표적 이미지인 聖人을 사용한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聖人이 절대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사람이라기 보다 대체적으로 道를 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올바른 방향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두번째 문장은 앞에 聖人이 만물을 만들어낸다고 하면 너무 의미가 거창해져서 그보다는 기본적인 방향성을 주고 의미를 만들어낸다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만사에 있어서 누군가 최초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과정은 필요하니까요.  이를테면 다윈이 진화론을 알아내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알아내었더라도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알아낸 대상을 소유하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우주를 어떻게 소유합니다.) 


이에 두번째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성인은 만물의 의미를 찾아내어도 무언가를 바라여서 하는 것이 아니며, 가치를 찾아내어 의미를 찾아주어도 이를 소유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위의 두문장에서 이어서 계속 道를 행하는 기본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恃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 그대로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어떤 자신만의 신념을 앞에 깔고 간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무언가 뒷일을 믿는다 (기대한다)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죠. 하지만 뒤의 내용들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은 먼가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어떤 일을 하고나서 그 과정을 너무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뒤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일단 첫 문장을 해석하면 뒤에는 다소 쉽게 해석되는 느낌입니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 과정만이 옳다고 믿지 않으며, 힘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서 그 이룩한 바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성취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번의 성취에 만족하고 뒤에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는 일이죠. 기업의 예를 들면 더 이해가 쉬울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초대박 상품을 하나 만들어내게된다면 이후 아무 것도 안해도 그 제품이 천년 만년 그 회사를 먹여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혁신과 개선이 이루어져야되는 것이죠. 그런 과정이 있어야 이전의 성과가 의미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번 수립된 개선의 경험은 다음 또 그 후의 개선에 Reference가 될 수 있습니다. 어디 사라지는게 아니죠. 풀어서 생각하면 위의 두 문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려한다

또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만들려 한다. 

有와 無는 서로 상생하는 방식으로 공존하며, 어려움과 쉬움이 상호 보완관계에서 성립되고, 

길고 짧음이 있어 비교를 할 수 있으며, 높고 낮음이 있어 경사가 이루어지며, 

음악과 목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가 있어 순서를 정해 진행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이에 자기 주장을 억지로 고집하지 않으며, 

남들을 가르킴에 있어서도 장황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교화한다.

만물의 의미를 찾아내어도 무언가를 바라여서 하는 것이 아니며, 

가치를 찾아내어 의미를 찾아주어도 이를 소유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 과정만이 옳다고 믿지 않으며, 힘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이룬바에 만족하여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서 그 이룩한 바가 없어지지 않는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장

2018. 11. 11. 09:16 from BoOk/pHiLoSoPhY

道可道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始 무명 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 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고 상무욕이 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 관기교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동 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시간 나는데로 틈틈히 노자도덕경 내용을 정리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 부문 말도 안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차피 개인적으로 정리하는 것이고, 시중에 나와있는 책들도 내용이 제 각각이니 여기 글 하나 올린다고 큰 일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노자도덕경은 우선 道와 名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비상명

 

모르는 한자는 하나도 없는데 보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지 싶다. 


생각 해보자면 사람들은 무언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대상을 규정하고 (Naming) 그 후 대응 방안을 만들어 낸다. (Solution이나 Rule) 노자도덕경은 그러한 대응방안()과 대상을 규정하는 행위 ()로부터 시작한다.

 

첫구절의 세문구 道可道는 이미 해결책이 나와있는 방안 정도로 해석하였다.

名可名 또한 이미 정의된 대상, 이름이 주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각 문구 뒤의 非常道와 非常名은 무슨 의미일까? 常자는 "항상 상"자이므로 常道와 常名은 변하지 않는 방안과 변하지 않는 정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않을까 싶다.  

 

위의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풀어서 첫 두줄만을 정리하자면

 

"이미 수립된 법칙이나 해결책이 있더라도 이것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어떠한 대상에 대해 내려진 정의도 영구 불변하지는 못한다."

 

인간들이 수립한 모든 법칙이나 규칙, 관습, 제도 등은 시간이 지나면 수정 / 보완되고, 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금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그리고 100년 200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이 드물다. 


이런 사례는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동안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지구가 광대한 우주의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나라는 수년 전까지 외도를 저지르면 법으로 간통죄를 처벌하였으나, 이제 그 법은 폐지되었다. 이름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불과 백년전에는 한양이나 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그보다 더 오랜 옛날에는 숱한 다른 지명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아직도 고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논쟁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왕검성이 어디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이론들이 펼쳐지고 있다.


변하지 않는 법칙은 없으며, 주어진 이름 또한 영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물지모

 

여기 두 줄을 단순히 직역하면 "無名은 천지의 시작이며, 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정도로 해석이 될 수 있겠다. (어? 간단히 해석되네... 그런데 무슨 말이지?) 해석해놓고 보니 무슨 의미인지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단원은 名에 대해 한단계 더 설명을 자세히 하는 문장이라고 이해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천지가 시작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無名이었으나 (정의됨이 없었으나) 만물이 생겨남에 따라 有名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다)."


이를테면 뭐 김춘수의 "꽃"과 같은 문장이라고나 할까? 의미없던 무수한 세상의 모든 것들 중의 하나에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그런... 


다른 의미로 생각하자면 無名사람들이 정의 내리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이므로 천지의 모든 대상을 말하는 것이며, 有明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부여된 대상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통계를 할 때 관심을 가지는 대상 전체가 모집단이라고 한다면 이 전체에 대해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그 중 일부는 표본집단으로 선출하여 이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짓고 방안을 수립하더라도 이는 전체 광대한 우주의 모든 현상 중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일부에 대해 차츰 그 영역을 넓히면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고상무욕이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관기교(요) 

 

이 구절의 앞의 세 단어는 항상 無欲이라고 해석될수도 있겠지만 常無를 欲한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욕구가 있냐 없냐로 문장이 넘어가는 것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었고 非常을 常無로 바꿔서 표현한 것이라는 쪽으로 이해하면 좀더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欲이라는 글자도 바란다나 욕망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의미 전달이 다소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하고자한다는 식의 의미로 해석했다. 


위의 내용이 모든 것이 영구불변하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점에 대해 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이를 전제로 모든일을 해나가려 한다면 ..."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밑의 문장은 "변치않고 영속하는 것을 찾는다면..."으로 대치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은 妙와 徼에 대해서 적절한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한데 상호 대치되는 개념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해석도 필요했다. 妙라는 단어는 사실 그 사전적 의미가 다소 확실해서 이론의 여지가 달리 없을 것 같다. 묘책이나 묘약이라는 단어서 쓰이는 의미를 생각하면 잘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어렵게 찾아낸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의미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구하다, 순찰하다, 돌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돈다"는 내용에 주목했다. 妙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궁극의 진리나 해결책이라면 徼는 밖으로는 들어나 있으나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변모한다는 것이 아닐까?


위의 내용들은 정리하여 이 두줄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고 무언가를 해나가려 한다면 그 깊은 진리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 종시 불변하는 영구불변의 것을 원하고자 한다면 결국 그런 것은 없으며 한 때의 진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 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1장의 마지막 두 문구다. 여기서 兩者는 마지막 異名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無名과 有名이라고 유추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즉 有名과 無名은 다른 이름을 가졌으나 같은 근원을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사실 이 다음 문구가 해석이 다소 난해하다.


우선 두번째 문구의 同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위에서 이야기한 근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異名을 가진 有와 無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모두' 또는 '같이'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모두'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玄이라는 말도 어떤 의미인지 모호하다. 玄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사실 간단하다. 천자문 제일 첫문장에 나온다. (天地玄黃) 검을 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다른 의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딱히 어느 의미가 적합할지도 의문이다. 다른 의미로도 해석을 하려 했는데 대학 1장을 읽다보니 반대되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1장의 첫 구절은 "大學之道 在明明德"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明"자는 구성원들 간의 Consensus가 이루어진, 쉽게말하자면 뻔한 상식, 당위성을 가진 덕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玄"은 그 반대로 아직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또는 더 깊이 의미를 가지자면 미쳐 고려의 대상이 되지못한 대상을 가르키기 위해 사용된 형용사로 보았다. 


위의 내용들을 반영하여 두 문장을 해석하자면


"이 두가지 無名과 有名은 이름은 다르나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니, 이 모두는 어두운 무지의 영역에서 비롯되어 玄이라 이른다. 어둡고도 어두우나 모든 근본적 이치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Six Sigma의 기본 절차는 DMAIC다. Define / Measure / Analyze / Improve / Control 인데, 우선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규명하고 (Define) 이후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확인을 위해 측정 (Measure) 및 분석 (Analyze)를 하며 이후 이에 대한 개선 (Improve)와 개선 이후의 관리 (Control)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자 첫장의 名은 결국 Define / Measure / Analyze 절차와 관련되며 뒤에 계속 언급될 道에 대한 이야기는 Improve 및 Control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위에 이야기한 내용들을 묶어서 아래와 같이 풀어본다.


"이미 수립된 법칙이나 해결책이 있더라도 종래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어떠한 대상에 대해 내려진 정의도 영구 불변하지는 못한다. 천지가 시작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정의됨이 없었으나, 만물이 생겨남에 따라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 나름 대상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고 무언가를 도모한다면 그 깊은 진리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 종시 불변하는 영구불변의 것을 찾고자 한다면 결국 그런 것은 없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대상이어도 의미가 변해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이 두가지 無名과 有名은 이름은 다르나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니, 이는 드러나있지 않았던 어두운 무지와 미지의 상태이다. 어둡고도 어두우나 결국 모든 근본적 이치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Posted by Tony Kim :

소년이 온다

2018. 8. 31. 09:54 from BoOk/nOvEl

"소년이 온다"는 80년 광주, 도청 함락 직전의 동호라는 중학생 소년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전체 6장 단락 각각에 동호와 그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있으며, 마지막 단락에서는 최근의 시점에서 동호의 이야기를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80년 광주는 이제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한국전쟁이 40년 전의 이야기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는 그만큼이나 이제 까마득한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났더라도 대한민국 군대가 비무장 자국민들에게 우발적이면서도 1회성이 아닌,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탄을 사용하여 무력진압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압군은 시위와 무관하게 길을 다니는 사람들을 살상했습니다.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고생, 길거리에 가족을 기다리던 임산부, 골목길을 걸어가던 고교생, 시위대를 바라보던 노인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쿠데타의 딸을 대통령으로 세웠었고, 역사는 몇십년을 다시 후퇴할 뻔 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까요? 지금도 곡학아세로 다시 시간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진영의 논리에 묻혀 무조건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국민들을 속이고 내빼기 바빴던 인간을 국부라느니,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을 보고 있자면 그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앞서 앞으로 저 말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혹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광주의 학살자도, 일제의 주구들도, 온갖 부정부폐의 원흉들도 제대로 단죄 받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잊어버리면 과거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무엇이 이익인가에 앞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였으면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