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德之容, 惟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활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中甚眞, 其中有信.
기중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자고급금, 기명부거, 이열중보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오아이지중보지위재, 이차
21장의 첫 글자는 孔입니다. 孔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로 쓰여진 걸까요? 사전을 찾아보면 구멍이라는 뜻으로 가장 먼저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뜻도 몇몇 있는데 크다던가, 헛되다, 통한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孔이라는 단어를 11장의 無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孔德之容이라는 첫 네 글자는 “비어있음의 덕은 받아들임 (수용함) 에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네 글자로 더욱 비움의 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惟道是從 “오로지 도는 이를 따른다”라는 것이죠. 첫 단원은 결국 비움의 미덕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이며, 왠만한 Solution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道는 다시 이야기 하지만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는 곳에 형성되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大道無門이라는 말은 큰길에는 일종의 검열 역할을 하는 Gateway 즉 門이 없다는 의미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나의 의지를 투영하려고 고집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수용할 수 있는 빈공간 또는 Play Ground를 만들어주면 그 다음 자연이 해결책과 새로운 Idea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道之爲物, 즉 구체화된 뭔가를 (物) 만들어내는 (爲) 길(道)이 되는 것이죠.
다음 세문장에 恍과 惚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쓰여집니다. 황홀하다라고 해석될 수 도 있는 이 두 글자는 이 경우 앞서 14장의 夷, 希, 微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상황이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말이죠.
전체적인 현상만으로 방안을 수립하려 하는 상황는 막연하고 막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차분이 수용하다보면 대상을 명확화할 수 있고 (象), 모호했던 것이 구체화되고 (物), 일을 추진하는 동력을 형성하게 되며 (精), 깊이 진실된 마음들을 모을 수 있고 (甚眞), 구성원들의 믿음도 확보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信)
이 모든 절차의 기본은 孔, 즉 나의 Bias가 반영되지 않은, 그것을 비운 수용하는 자세에 있다고 본 것이죠.
마지막 두 문구는 수용하는 자세가 오래토록 검증된 道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로 보았습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즉,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不去) 정의 (名)라는 것은 덧붙여 설명하자면 오래살아남은 절차나 제도, 문화는 일반 대중들의 (衆甫) 교열 (閱), 즉 집단지성의 검증을 거친 대상들이라는 것이죠.
오래 살아남은 이름이나 방식, 습관, 문화는 결국 한 위대한 위인의 갑작스런 발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그 구성원들의 반복된 정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라는 마지막 말은 이를 강조해 표현한 것으로 “내가 어찌 사람들의 상태를 알겠는가, 이로써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그 대중의 문화나 습관은 그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문화나 관습을 보면 그 구성원들이 거쳐온 역사와 환경, 그리고 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선지여악, 상거하약. 인지소외, 불가불외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형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기미조,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여상아지미해. 내래혜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요혜사무소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도덕경 20장은 絶學無憂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배움을 끊으면 근심할 바가 없다라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또는 공부 해봐야 근심거리만 되므로 그냥 속 편하게 살도록 배움을 멈추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노자의 철학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絶學無憂라는 말은 배움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되며, 눈 앞에 재앙이 다가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뒤의 문장을 보면 이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唯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공손히 대답하는 말”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阿라는 단어는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唯之與阿, 相去幾何라는 말은 공손하게 또는 친근하게 상대방에게 이야기 하는 것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가, 즉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한거죠.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칠 것이고, 결국 이 배움을 바탕으로 어른들에게는 존대를 하게 됩니다. 배우지 못한 아이 때는 주변 사람들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더라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남발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이 문장의 더 가까운 뜻은 어느 경우에 또는 어느 대상에게 공손해야 되며, 어느 사람이나 경우에 상대방에 친밀하게 대하여도 되는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라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결국 배움이 중요한 거죠. 배움이 부족하면 경계에 대한 구분도 합리적이지 못할 수 있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善之與惡, 相去何若라는 말도 선과 악이 때로는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경계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악에 발을 담그게 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人之所畏, 不可不畏라는 글에서 之라는 단어는 有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대상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직역되는데, 이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 심각성을 인지 못하면 아무리 큰 재앙이 코 앞에 닥쳐도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문구입니다.
다음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荒兮其未央哉, 거칠고 어두운 재앙이 아직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닥치지 않은 상황에서는)
衆人熙熙 사람들은 희희낙낙합니다.
如亨太牢 그냥 고기 굽고,
如春登臺 봄날 전망대에 올라 즐기 듯 말이죠.
我獨泊兮其未兆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견하는 나는 (노자는) 홀로 아직 닥치지 않은 이 징조를 초조한 마음으로 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어지는 如嬰兒之未孩라는 말은 아직 어린아이도 못된 간난아기로 해석하였습니다. 뒤이은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게으르고 게으르니 사람들이 여유가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은 향하는 바가 없다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목적이 없다라는 뜻으로도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겠고요. 바라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없이 지내게 되면 결국 그 나태함의 대가가 후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그 시간에서의 안락함에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이 두 문구는 마치 굴원의 ‘어부사’를 생각나게 하는 문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입으로 닥쳐오는 위기를 무시하면, 이를 알고 있는 나는 홀로 버려져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게된다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나머지 문구는 노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에 문장별로 해석하려 합니다.
沌沌兮, 나는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지는데
俗人昭昭, 사람들은 모두 총명한 것처럼 굴며 나를 대하고
我獨昏昏, 나는 어찌 이 위기를 헤쳐나갈지 혼란스러운데
俗人察察, 사람들은 통찰력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대수롭치 않게 여기며,
我獨悶悶, 나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데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衆人皆有以,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이를 보아 바다와 같이 담담하고 바람소리와 같이 거칠 것이 없게 보인다.
而我獨頑且鄙, 오직 나만이 고집불통이어서 쓰일 곳 없이 되었으니,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귀히 여겨서다.
거의 대부분 우리 속담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마지막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는 말은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위기에 대해 내가 근심하는 것은 결국 나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안위와도 연결이 되어서, 그리고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모를 대표적으로 표연하여 타인의 안위가 이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지않을가 하는 것이 자신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들기위한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20장의 이야기는 배움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움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위기에 대한 인식 능력은 결국 배움에서 비롯되며, 걱정없이 되는데로 살다보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하게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 하는 것이 20장에서 노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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