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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 38장

2023. 6. 19. 15:47 from BoOk/pHiLoSoPhY

上德不德 是以有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下德爲之而有以爲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有以爲
상인위지이유이위
上義爲之而有以爲
상의위지이유이위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상례위지이막지응 즉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시이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처기실 불거기화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덕이 높으면 (사사로운) 덕은 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덕일 수 있다.”
 
38장은 德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上德不德이라는 문구는 天地不仁으로 시작되었던 5장의 내용을 연상하게 합니다. 천지가 그 나름의 방식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특정 대상으로의 치우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38장에서도 첫 문장은 “높은 덕은 덕이 없다.”라고 역설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는 “특정 대상에 치우쳐 사사로운 덕을 배풀지는 않는다”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른바 덕을 베풀고, 덕을 봤다라고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내가 덕을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자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한정된 자원을 나와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 또는 그런 사람들 먼저 베푼다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사람들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정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될 수 있고, 또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민해야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노자는 높은 덕은 부덕하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是以有德 그래야 덕이 유지될 수 있다, 덕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덕이 낮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덕을 잃지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덕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낮은 德은 특정 대상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 연연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이런 편파성이 계속된다면 구성원 전체적으로는 Leader의 행위를 진정한 덕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특정 대상에 특혜를 베푸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게되죠. 이런 행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사람들도 덕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게되는 즉 無德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권한이 주어지게되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이 우선 생각되기 마련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부터 우선 챙기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기만 이런 행위가 단기간 영향이 낮은 수준에 그친다면 몰라도, 구속력 있고 영향력이 높은 정책이나 방침으로 정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선택은 德이라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 자원을 배분할 때에는 그 수혜의 총량을 어떻게 하면 널리 그리고 최대화 시킬 수 있는가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특정 대상에 치우치는 선택을 해서는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덕이 높은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러려니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덕이 낮다는 것은 어디론가 치우치고, 독선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강요하는 것이다.”
 
“以爲”라는 문구는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문구는 높은 덕을 이룬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치우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에 그게 옳다라고 근거도 없이 선입견을 가져서도 않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그러한 결과물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혹은 특정 방향에 치우친다던가, 아니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한 방향을 고려하여야 上德 즉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라는 의미죠.
 
반면에 낮은 덕은 특정 대상만을 위하고, 혹은 무언가 하고자하는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관습이라던가, 선례라던가 아니면 사심에서 비롯된 이유로 “이런 경우에는 이래야만 해!”라는 전제를 깔아놓으면, 下德 즉 그냥 그런 혹은 불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게된다는 거죠.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仁이나 義라는 것은 그 수준이 높다고 한들, 낮은 덕과 같이 그 지양하는 바가 있으며,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下德爲之而有以爲이라는 문구에서 下德이라는 단어가 上仁과 上義라는 단어로 치환이 되어있습니다.
 
즉, 위에 말한 것을 참고하면 높은 仁이나 禮라는 것도 결국은 결국 무언가 의도한 바를, 특정한  대상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행위 밖에 안된다는 이야기로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교의 핵심 Code인 仁義禮智信 중 첫 세가지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유교를 Target으로 비판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德이라는 가치보다도 仁은 아무리 높아도 그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을까요? 생각하면 노자가 생각하는 방향과 유교의 지향점이 매우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유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되지만 세상에는 명확히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 있고, 노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도달하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요, 순과 같은 성인이 지향점이 되는거고요.
 
무언가 지향점을 놓고, 임금이나 부모 등 기득권에 충성해야된다는 유교의 이론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을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예라는 것도 무언가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요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따르지 않으면, 어께를 걷어올려 그를 부수고 깨뜨리려 한다.”
 
禮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높은 비판을 노자는 가하고 있습니다. 고도화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예절 혹은 예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통치자의 혹은 권력자의 의도된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런 사상이나 정책에 따르지않는 무리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이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제국들은 상대를 야만이라는 표현으로 공격하며 침탈의 근거로 삼았던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교와 이단에 대한 공격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효종 사후 수많은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은 그 복제에 대한 각 정파의 해석과 비난이 근거를 이루었었습니다. 禮가 본래 내걸었던 타인을 공경하고 아끼는 적절한 표현 방식에서 벋어나 이방인을 배척하고 탄합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노자는 보았던 것 같습니다.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이런 이유로 도를 잃으면 덕을 찾게되고, 덕을 잃으면 인을 찾으며, 인을 잃게되면 의를 찾게되고, 의를 잃으면 예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道부터 禮에 이르게되는 관점을 보여주는 문구입니다. 道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게되면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배분하는 德이라는 방식에 의존하게되며, 이러한 德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내가 존경을 받게라도 하여야하는 仁이라는 방식을 모색하게 되고,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 우리끼리의 義理를 잃지않도록 사람들은 고민하고, 그 의리에도 기댈 수 없다면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강압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무릇 예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란 충과 믿음이 얄팍하니, 혼란의 시작이 된다.”
 
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위의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忠이라는 글자는 마음을 나타내는 心자 위에 가운데를 나타내는 中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의 중심 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中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기계적인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中은 Bull’s Eye 즉 핵심이 되는 가장 적합한 상황을 가르키는 단어라고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즉 忠은 가장 적합한 마음상태 또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가르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忠 그리고 미혹되지 않는 믿음 (信)을 남에게 주지 못하는 자들이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禮를 들이밀며 상대를 겁박한다면 시작부터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합니다.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이들은) 나 홀로 앞을 내다본다 이야기하며 자신이 내세우는 방도를 미사여구로 꾸며대니, 우환의 시작이 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기대어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본인만이 앞을 내다본다고 고집하면 밑에 사람들은 그 방도가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칭송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조직에는 소신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내가 다 아는데 말이야” 라는 식으로 전제를 깔아버리는 여기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일은 결국 기대에 못 미치거나 엉망이 되기 십상이고요.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이런 이유로 대장부는 그 바탕이 두텁고 탄탄한 곳에 머물며, 근거와 정당성이 희박한 곳에는 머물지 않으려 한다. 또한,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려 하지 겉만 화려한 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노자의 이야기는 화려한 예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례허식에 눈을 가리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흔히 정당성이 떨어지는 정권은 아무 실속이 없는 거대한 행사나 예복에 집착합니다. 전제국가의 독재자들을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보면 초라한 나라에 걸맞지않는 수많은 훈장과 금빛 메달로 군복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 보다는 대부분 촌스럽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대장부라면 우리의 선택이 어떻게 되어야 실익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일부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두텁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된다 이야기 합니다.
 
故去彼取此
고로 표면을 덮고있는 것을 걷어내어 그 안의 실질적인 것을 취한다.”
 
禮라는 화려한 외피를 걷어내어 그리고 禮로서 공고화된 기존 질서를 벋어나서 무엇이 정말 더 나은 방향인가, 무엇이 더 혁신할 수 있는 한단계 더 나갈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로 노자는 38장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22년 독서 목록

2023. 1. 1. 13:13 from BoOk

1.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2.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Matt Haig)
3. 메트로폴리스 (벤 윌슨)
4.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B. 피터슨)
5. 프랑스 혁명사 6권, 헌법의 완성 (주명철)
6. 용서로 가는 네가지 길 (어슐러 K. 르귄)
7. 우주 시간 그 너머 (크리스토프갈파르)
8. 저주토끼 (정보라)
9. 마음의 법칙 (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10. 프랑스 혁명사 7권, 제 2의 혁명 (주명철)
11.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12. 프랑스혁명사 8권, 피로 세운 공화국 (주명철)
13.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14. 요즘, 일본 (공태희)
15. 우울할 땐 뇌 과학 (엘릭스 코브)
1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 실록 (박영규)
17. 백년전쟁 1337-1453 (데즈먼드 수어드, 再讀)
18. 길가메시 서사시 (앤드류 조지)
19. 담마빠다 (일아 스님 옮김)
20. 지금 비스마르크 (에버하르트콜브)
21. 무질서가 만든 질서 (스튜어트 A. 카우프만)
22. 술 잡학사전 (클레어버더)
23. 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24. 달의 궁전 (폴 오스터)
25. 프랑스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주명철)
26.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민까지 (노명식)
27. 하얼빈 (김훈)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7장

2022. 5. 19. 14:01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통상 어떤 특정 대상을 위주로 하지않아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無爲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않는다라는 더 심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데로 내버려둔다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그런 의미라면 노자는 애시당초 이런 책도 쓰지 말았어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데로 내버려두라고 하려면 이런 글도 쓰는게 아니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변화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오며, 기회의 모습으로도 다가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변화에 대응해야 되며, 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처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에서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대응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전체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해야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단체들만을 위한 방도는 결국 그 집단에게도 해가 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세계의 많은 독제국가나 부폐한 나라들을 보면 특정 계층은 모든 부를 독차지하며 그 기회를 누리는 듯하지만 그 계층 사람들도 경호원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최악의 경우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언제든 최악의 경우로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것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법도 규칙도 관습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최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특정 방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공동체 전체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치지 말아라. 그래야 진정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도덕경 37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왕후들이 이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발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위의 첫 문장은 새로운 방도를 마련함에 있어 지향점 또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즉 전체 이익을 고려하지 어느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태도를 버린다면 그 새로운 방안의 영향을 받게되는 대상들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변화하고 지향하는 바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흔히 결과의 공평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불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의 공평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부당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생각되면 이러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은 조직을, 사회를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들은 이러한 점을 항상 고려하여 일을 추진해야된다고 이야기합니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무언가를 화합하여 만들려할 때, 우리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원소재를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도록) 엄밀히 통제하면서 일을 추진할 것이다.”

 

化라는 단어가 앞 문구에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변화한다는 의미보다는 화합한다는 (또는 조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기존의 또는 현존하는 무언가를 조합하여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作) 있을 테니까요.

 

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띄기 전 원재료 상태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無名이라는 단어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들을 조합하여 또는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새로운 법칙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鎭 즉 진압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 많은 경우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억누르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억눌러야할 대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엄밀히 또는 매우 조심하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큰 대리석 원석을 쪼아내어 조각상을 만들어낼 때 덜어낼 부분과 남길 부분을 매우 조심해서 작업하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식의 해석은 노자의 내용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아직 규정되지 않은 밑바탕 단계라면, 이 또한 어떤 지향하는 또는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에서 가르키는 것처럼 엄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관리 하에 새로운 것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재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통나무는 (樸)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나무 그릇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도끼 자루가 될 수도 있으며, 악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철처한 계획과 숙련된 작업자의 통제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통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업자의 문제인거죠. 통나무는 무엇을 되고싶다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통나무를 탓할 수 없듯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원들의 열망과 역량이 갖춰져 있더라도 잘못된 리더의 생각과 독선에 의해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리한 욕심이 없으면 안정될 것이며, 천하가 장차 자발적으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위의 無欲과 이 문장에서의 不欲은 주어가 다른 대상을 가르키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이 원재료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無欲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不欲은 리더가 무언가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자신을 위한 또는 Inner Circle을 위한 욕심을 가지게되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됩니다. 특히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은 엄밀히 말하자면 위임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활용한다면 분란이 발생될 소지만을 키우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자세를 버리면 靜 즉 조직이, 사회가, 구성원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가게되고 더불어 적절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죠.

 

37장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편견을 가지거나 개인적 욕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과 대신 편견과 아집 그리고 독선을 버리고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면 사회는 계속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6장

2022. 4. 18. 16:36 from BoOk/pHiLoSoPhY

將欲翕之 必姑張之

장욕흡지 필고장지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욕약지 필고강지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욕거지 필고여지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욕탈지 필고여지

是謂微明 柔弱勝强

시위미명 유약승강

魚不脫於淵

어불탈어연

國利器 不可以示人

국이기 불가이시인

 

將欲翕之 必姑張之

하나로 무언가를 모으려 한다면, 잠시 그 대상들을 벌려놓아 운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도덕경 36장은 해석에 있어 다소 논란이 되는 장입니다. 첫 문장의 내용과 비슷한 구조의 내용이 네번째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의 내용을 권모술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翕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합한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를 축소시킨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경쟁자나 아랫사람 중 경계해야될 대상을 몰락시키고 싶다면 일단은 잠간이라도 권한을 더 주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약하게 하려면 잠간 강하게 만들어봐라, 제거하려는 대상이라면 잠간은 같이 해라, 라는 식으로 해석하여 속으로는 검은 마음을 품었지만 겉으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이중적 모습의 냉혹한 리더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36장에서 앞뒤 맥락없이 경쟁자를 몰락시키는 노하우를 말하는 것은 다소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서 고기는 연못을 못벋어난다는 얘기와도 연결되는 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요.

 

오히려 이번 장의 내용은 검증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변화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였습니다.

 

첫 문장의 내용 중 “將欲翕之”라는 말은 기존의 방법이나 정책을 무언가 다른 것과 통합을 하는 변화를 추진하려할 때,  더 나은 방향으로 조정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을 때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必姑張之라는 이야기는 이런 시도에 앞서 잠시만이라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확대해서 운영해보자는거죠. 그렇게 하면 이러한 대상 Process의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이를 통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가 가늠할 수 있게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지방정부에서 대중교통 전용차선 운영을 검토한다고 생각해보죠. 이 경우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주말만 아니면, 주중만 운영하는 것을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기간을 정하고 한달 정도 전면 시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고 뭐가 보완되어야 할 내용인지, 그리고 좋은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하면 더 나을지를 확인하기 나을 수 있습니다.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전면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아니면 이제 폐기를 검토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면, 과연 이런 결정이 맞는지 잠간이라도 나의 의도와 반대방향으로의 검증차원의 운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 뒤의 문구들도 거의 같은 의미 입니다.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차 약화시키고져 하는 사항이 있다면, 잠시라도 강화시켜 운영해볼 필요가 있다.”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차 제거해야될 항목이 있다면, 잠시라도 같이 하여 정말 제거해야될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차 그 권한을 빼앗아야할 대상이 있다면, 일단 권한을 주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화할 필요가 있다.”

 

상기 네 문구의 내용은 거의 모두 현재 있는 것들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는 등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강화시키는 것도 힘든 과정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무언가를 축소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큰 조직일수록 각 조직의, 그리고 담당자에게 주어진 업무가 있고 또한 그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다보면 어떠한 업무 Process에 대해서는 기존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 보다 새로운, 아니면 다른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의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동의 과정없이 리더의 판단만으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조직의 반발은 둘째 치고 독선에 의한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권한이나 업무 과정을 약화시키고 들어내고 다른곳으로 옮기기에 앞서 정말 이런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확인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대상이 되는 항목에 대해 강제로라도 증폭시켜서 아니면 집중 검증하여 정말 그 결정이 옳았는지, 파악해야된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是謂微明 柔弱勝强

이를 미명, 즉 잠간 동안의 시간을 두어 명확화하는 과정이라 한다. 강제로 무언가를 변경시키는 것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微明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희미하게 밝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微라는 단어가 매우 작은 상황이나 순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明이라는 단어가 그 대상의 장단점과 이슈 및 리스크를 명확히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微明이라는 단어는 어떤 대상을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파악됩니다.

 

柔弱勝强이라는 문구는 柔弱함이 强함을 이긴다라고 해석되는데, 거꾸로 해석하면 어떤 변화를 모색할 때 너무 강압적으로 추진하기 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한 방안을 채택하는 것이 더 성공확율이 높다라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당장 시간이 더 걸릴터이고 무조건 ‘내말이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는 약하게 비춰질 수 있으나, 결국 더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거죠.

 

경험적으로도 새로운 책임자들이 자리에 올라 기존의 절차를 용도폐기 시키고 새로운 방법을 강압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고 합니다. 하기만 이럴 때 대부분 그 분께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절차도 같이 운명을 다하곤 하죠. 그리고 그 분께서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냥 하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거죠.

 

왜일까요?

 

魚不脫於淵

물고기는 연못을 빠져나올 수 없다.”

 

물고기 보고 살고 있던 연못을 빠져나오라고 하면, 그 물고기는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 연못은 이미 먹이가 다 고갈되어가거나, 오염이 임박했거나 하더라도 그 연못 안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던 물고기는 그 필요성을 좀처럼 절감하기 힘들 겁니다. 내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실상 그 절차에 익숙한 사람은 변화의 필요에 대해 실증을 하기 전까지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듭니다. (특히 권한이 축소되어나 없어지는 경우라면 더욱 심할 겁니다.)

 

숲 속에 있으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비유와도 비슷한 경우죠. 권한 조정의 대상이 되는 상대는 대부분 기존 절차나 Process, 또는 생활에 익숙해져있어 더 나은 방식으로의 변경에 대해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들기 쉬우며, 심한 경우는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기 십상입니다. 

 

國利器 不可以示人

나라에 도움이 되는 도구는 사람들에게 지시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변화라고, 또는 새로운 절차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지시만 한다고 이루어지고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에 따른 이익을, 효과를 그리고 향상에 대한 가능성을 직접 보여주고 몸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기존의 것을 과감히 떠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자 36장은 안주하려는 조직을 어떻게 변모시켜야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검증과 공감을 통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한여름 지리산 둘레길 Guide

2022. 4. 12. 13:00 from TrIp

매년 2박3일이나 1박2일로 지리산 둘레길을 찾은게 5년이 되었다. 전체 21개 코스 중 네 코스만 안가봤으니, 이제 한두번만 더 가면 거의 전 코스를 다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섯번 방문 중에 첫 세번은 여름휴가를 이용해 7월 마지막주나 8월 첫째주에 방문했었고, 작년과 금년의 경우는 회사 창립기념일을 이용해 봄에 갔다왔다. (개인적으로는 봄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여러 측면에서 장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둘레길을 찾을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휴가를 따로 내기 어려운 점이 여름 방문의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다.

여기서는 여름 둘레길을 방문했었을 때 느꼈던 몇몇 가지들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더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나름 몇 번 방문하면서 생긴 노하우를 공유한다고나 할까.)



① 팔토시와 챙 넓은 모자는 필수, 바지도 긴 바지를 착용할 것. 썬크림 / 썬스틱과 썬글라스도 필요

지리산 둘레길은 많은 경우 산길로 이어지지만 중간중간 그늘 하나 없는 마을길을 돌기도 한다. 이 경우 날씨 좋은 봄이나 가을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여름이라면 작렬하는 태양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또한 산 속이라도 포장된 임도를 따라 걷는 경우, 햇빛에 긴 시간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가끔 둘레길을 그늘진 산으로만 도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반팔, 반바지에 모자도 안쓰고 오시는 분들이 있다. 평생 밖에서 햇빛에 단련된 업종에 종사하신 분들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특히나 사무실 근무가 대부분인 직장인들은 강한 햇빛으로 인한 화상을 온몸에 입기 십상이다. 이런 고통쯤 나는 이겨낼 수 있다는 분들이라면, 뭐 그래 정신력을 높이 산다. 하지만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그나마 가볍게 고생으로 그치면 다행이지만 화상이 심해지면 몸이 상할 수도 있다.

왠만하면 가릴 수 있는 부분은 팔토시, 모자, 긴바지로 최대한 가리고, 썬글라스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꼭 쓰며, 노출된 부위는 수시로 썬크림이나 썬스틱을 발라주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사용하기 편해 썬크림 보다는 썬스틱을 선호한다.)

② 물은 넉넉히, 수통도 몇 개는 가지고 다닐 것. 비상식량으로 비스킷을 추천

제주도 올레길이나 강원도 해파랑길을 다녀오신 분들이 지리산 둘레길도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고 왠만한 것은 지나가며 현지에서 사면 된다는 마음으로 오는 걸 보곤한다.

아니다! 아주! 많이! 매우! 다르다.

내가 올레길이나 해파랑길을 다 돌지는 않았지만, 거기는 그래도 중간중간 식당이나 상점들을 하루에 몇번은 거치게 된다. 하지만, 둘레길은 코스 중간에 정말! 진짜!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개장터 등 몇 군데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도 인월에서 출발한 첫 방문시 점심은 중간에 식당이 나오면 사먹어야지라고 생각하고 걷다가 정말 2시까지 생으로 굶으면서 걸었었다. (산 속에 식당이 있을리 없지 않는가?) 더워서 땀은 비 오듯 흐르지, 길은 험하지, 배는 고프지... 멘붕님이 나를 꼭 끌어안는 것을 느꼈었다.

중간에 힘들게 마을을 만나더라도 식당은 커녕 슈퍼 하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점심에 허기가 질 것에 대비해 비상식량은 꼭 챙길 것을 권한다.

하지만 여름의 경우, 찌는 듯한 날씨에 왠만한 음식들은 상하기 쉬워 어떤 음식을 챙길지도 사실 고민이 된다. 많이들 산행시 견과류와 초코렛으로 만든 에너지바를 준비하는데, 여름에는 피하는게 좋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봉지 안에서 죽처럼 되버릴 가능성이 높다.)

뭐 나는 비위가 좋아서 끈적끈적하게 녹은 에너지바 쯤 손으로 퍼먹을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하셔도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경우 포장지를 뜯을 엄두도 못 내게된다. 잘 상하지 않고, 여름에 휴대하기도 좋은 대안을 찾는다면 비스킷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다이제를 선호한다. 몇 개만 먹어도 허기가 가신다.)

물론 퍽퍽한 비스킷을 더운 길 위에서 우걱우걱 씹어먹는 것은 과히 내키지않는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운이 좋아 중간에 식당을 만날 자신이 없다면, 이 경우 맛은 사치이다. 한끼 때우는 목적에 충실한 것을 찾는다면 비스킷 만한 것은 없다.


그나마 식사는 하루 세번이고 아침, 저녁은 숙소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점심만 위의 방법으로 대비하면 된다. 하지만 물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여름 지리산 둘레길은 더위와의 전쟁이다. 땀을 흘리는 이상으로 물은 수시로 보충해줘야 한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 한 것처럼 가게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도중에 물이 떨어진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나마 마을이라도 지나가면 양해를 구하고 수돗물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만, 산 속에서 개울도 없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한다. (실례로 3년전 산 속에서 물 3통이 거의 다 떨어지는 위기 상황이 있었다. 점점 탈진 증세가 와서 열걸음 걷고 앉아 쉬었다가 다시 열걸음 걷는 식으로 이동했던 기억이 있다.)

배낭이 무거워지더라도 물은 최소 3통 정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중간에 민가를 만나거나 마을 공용 수도 등을 만난다면, 물은 1순위로 보충해라. (그냥 기회가 있으면 새로 채워라.)

나는 살아 생전 수돗물을 그냥 마신 적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방법은 두가지다. 배낭 가득 생수를 미리 채우거나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거나. (차마 쓰러지는 것은 옵션에서 빼겠다.)


배 고픈 것은 어떻게던 참아지지만, 탈수는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놀러갔다가 119에 실려오지 않도록 해야되지 않겠는가.


③ 아무리 피곤해도 장기 코스라면 빨래는 꼭

경험해보신 분들은 공감을 하겠지만 여름 둘레길은 하루 걷고나면 몸에 걸친 거의 모든 옷들이 땀으로 범벅이 되게된다. (거의 소금이 보인다.) 1박2일 정도의 단기여행에 갈아입을 옷을 넉넉히 가져왔다면 모르겠지만, 2일 이상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세탁은 필수다.

숙소에 따라 친절하게 먼저 물어보고 세탁기를 돌려주시는 사장님들도 계시지만, 샤워할 때 쓰라며 빨래비누만 주는 경우도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끈적거리고, 쉰 내 나는 옷을 몇일씩 입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다면 당신의 무던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어찌되었던 세탁은 하고 쉴 것을 권한다.

더운 여름 산속의 숙소에 빨래를 널면 대부분 다음날 출발할 때 쯤이면 뽀송뽀송하게 건조가 다 된다. 혹여 빨래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은 안해도 된다.

④ 출발은 가능한 빨리

지리산 둘레길은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힘이 드는 코스다. 하루를 통으로 걷는다면 보통 산 2~3개는 넘는다 생각하면 된다. 특히나 여름은 여기에 더위까지 더해져 더 힘들다. 숙소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저녁 먹으면서 막걸리나 맥주까지 반주로 더하면 10시도 안되 기절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혼자라면)

아침이면 온 몸이 쑤시고 조금 더 누워있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이쯤에서 그냥 접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뭐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계속 걸을 생각이라면 가능한 아침은 빨리 먹고 새벽같이 출발할 것을 권한다.

가능한 선선한 시간에 걷는 것이 나은 측면도 있지만, 산 속에서는 하루가 더 짧을 수 있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에 출발하면 그만큼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아침에 조금 서두르면 중간에 쉬는 시간이 더 여유있을 수도 있다. 도착지와 숙소가 이미 정해져 있더라도 최대한 더운 시간을 피하는 장점도 있다. 아무튼 가능한 일찍 출발할 것을 권한다.

야간산행이 취미라는 분들이라면 위의 내용은 해당이 안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상 지리산 둘레길은 하루 내내 걸어도 도중에 1~2팀을 만나기 어려웠고, 여름에는 더더욱이나 사람이 없다. 담력이 상당히 좋아 왠만한 것은 무섭지 않은 강심장의 소유자라면 모를까, 해가 진 아무도 없는 산 속은 다소 호러체험이 될 수 있다.


⑤ 여름 뿐 아닌 고려 사항

몇번 언급한 바와 같이 지리산 둘레길은 그냥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넘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언젠가 산 속에서 만난 분이 기억 난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숨을 헐떡거리며 “젠장, 둘레길이라더니…”라며 속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건 그냥 마을 둘레를 쉬엄쉬엄 도는 코스가 아니다. 그 둘레라는 말은 지리산 둘레에 있는 산이라는 이야기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걷는다면 산을 보통 2~3개는 넘는다. 이쯤되면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등산에 대한 준비가 철저해야 된다.

다리 힘이 넘치는 분들이 아니라면 스틱은 필수로 챙기시길 권한다. 어느 구간은 매우 가파픈 경사가 몇 시간씩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스틱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매우 크다. 등산스틱은 체중을 적절히 분산 시키는 효과가 있어 무엇보다도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배낭에 들어가기 쉬운 삼단 스틱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발에 익은 편한 등산화를 착용하는 것을 권한다. 길이 안든 혹은 발에 맞지도않는 새 등산화를 신는 것은 비단 둘레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기 산행의 경우에도 별로 권할만한 선택은 못된다. 참고로 나도 첫 둘레길 방문시 새 등산화가 맞지않아 발가락 주변이 퉁퉁 붇는 고생을 했었다. (등산화만 아니었다면 몇일 더 있었을지 모른다.) 기존에 익숙했던 등산화가 없다면 중간중간 신발끈을 조정하면서라도 발에 통증 등 무리가 가지않도록 해야하며, 꼭 발톱은 사전에 정리할 것을 권한다. (발톱이 빠져서 피가 철철 난다면 얼마나 괴롭겠나.)

또한 스마트폰에 대부분 기본으로 장착이 되어있겠지만, 네이버맵이나 카카오맵 등 지도 어플은 필히 깔아놓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걷다가 조금이라도 애매하다 싶으면 당장 맵을 켜라. 그리고 내가 맞는 방향으로 이동 중인지 확인해라. 물론 중간에 맵에 표시된 길이 사유지 등의 사유로 막혀서 경로가 다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왠만하면 거의 일치한다.

주의를 소홀이 하거나 그냥 감으로 방향을 잡았다가는 엉뚱한 방향으로 헉헉거리면서 한참을 올라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몇 번 길을 잘못 들었었는데, 더운날 힘들게 오른 길이 전혀 반대 방향임을 알게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지리산 둘레길에는 중간중간 ‘벅수’라고 부르는 표지목이 있지만, 정작 애매한 갈림길에는 표지가 없거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엉뚱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올레길보다 많은 측면에서 환경이 열악함을 각오해야 한다.)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라면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어차피 여기 걷기 위해 온 것이니 좀 더 걸었다 생각하자라며 허허 웃어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찌는 듯한 여름 둘레길이라면 그런 성인은 찾기 어렵다. 애매하다 싶으면 지도는 꼭 확인하라.

그리고 이건 좀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경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만 이동해야한다. 왠지 마을길은 편할 것 같고 저쯤에서 지름길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믿고 감으로 이동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몇 년전 친구들과 한번 동행했을 때 이런 경험을 했었다. 그 녀석들이 우겨서 마을 둑길로 한시간을 걷었는데, 코스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작렬하는 햇살에 열사병까지 나를 부르는 것을 간신히 벗어났던 기억이 있다.)

⑥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여름이 아니어도 지리산 둘레길은 여타 제주 올레길이나 동해안 해파랑길보다 더 험하고,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다. 공중화장실은 하루 종일 가도 한번 만날까 말까하며, 카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식당도 찾기 힘들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만나면 다행이다.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목도 빈 곳이 많아 불편하다. 여기에 여름에는 벌레도 많다. 벌레 때문에 어디 한군데 자리를 잡고 사진조차 찍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사실 작년부터 봄에 둘레길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벌레 때문이다.)


하지만 둘레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경험이다. 한참을 헉헉거리며 오르다 돌아봤을 때 겹겹히 둘러쳐진 지리산 경치에 넋을 놓기도 하고, 중간중간 지나는 시골마을 길에 마음이 따스해지곤 한다. 구름과 달이 없는 날이라면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에 감탄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민박은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숙박이 가능하다. 또한 식사도 훌륭하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등구재, 동강, 원부춘 민박에서의 아침과 저녁식사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번씩 짧게나마 방문하는 둘레길에서 많은 기운을 받고 일상을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다. 얼마 안남은 코스들도 소중한 마음으로 찾으려 한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5장

2022. 3. 29. 16:23 from BoOk/pHiLoSoPhY

執大象, 天下往

집대상, 천하왕

往而不害, 安平太

왕이불해, 안평태

樂與餌, 過客止

낙여이, 과객지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執大象, 天下往

영향력이 큰 것을 이해하고 통제해야, 천하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기 된다.”

 

이번 장은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첫번째 문장은 이러한 실행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執大象” 즉 큰 대상을 잡고 흔들어야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그래야 천하가 往 즉 온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올 往이라는 한자는 나를 중심으로 상대가 온다라는 의미이므로 천하가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는 천하의 사람들이 나에게로 모여든다, 관심을 받아 변화를 주도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문구는 통계에서 사용되는 파레토 법칙을 연상시킵니다. 파레토 법칙은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의 20%의 영향에 비롯된다는 이론인데요, 결국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이를 대상으로 개선을 추진해야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往而不害, 安平太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결과가 해롭지 않도록 추진해야 하며, 걱정없이 평안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선활동의 지향점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뒤의 세글자 安平太를 앞의 구절의 영향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해롭지 않으면 평안하다는 것은 좀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어지는 말로 보았습니다.

 

往而不害라는 말은 직역하면 ‘다가오니 해롭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다가오지 않으면 해롭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머물면, 안주하면 해롭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거죠. 어찌되었건 안주해서는 안된다. 머물지 않고, 변화를 주도해야 위태롭지 않다. 그래야 더욱 안전해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太라는 글자는 앞의 安이나 平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太라는 글자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더불어 더욱 커질 수 있다. 즉 성장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어느 학생이 큰 방향 전환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이나 습관을 개선하여 이전보다는 더 편하게 (安) 더 쉽게 (平) 문제를 풀 수 있게되었다고 생각해보죠.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다보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되는거고, 무언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太라고 생각할 수 있지않을까 봅니다.

 

樂與餌, 過客止

같이 하는 사람들을 즐겁고 배부르게 해야한다,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조차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냥 이 문장을 직해하면 ‘먹고 즐거우니 지나는 손님도 가는 걸음을 멈춘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내용을 생각하면 결국 이 문장은 변화의 지향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道가 수많은 방편 중의 하나라면 德은 이중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 한바 있는데 결국 이 문장은 그 덕의 일면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나는 나그네를 여기서 언급한 것은 우리들만의 주관적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보아도 객관적으로 변화의 방향이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냥 자극적이도 단기적인 성과가 아닌 누가 보아도 공감할만한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져야된다는 거죠..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모든 도의 마지막은 맛이 거의 없는 담담한 상황과 같다.”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해야되나 사실 조금 고민을 했었습니다. 出口를 한 단어로 생각하여 도의 출구라고 생각하여야 할지 그리고 淡이라는 단어는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될지도 잘 판단이 서지를 않더군요.

 

결론적으로 出口는 문자 그대로 끝나는 지점, 빠져나오는 상황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道는 영원하지 않고 마지막이 있으며, 맛이 없는 담담한 상황은 이미 주변에 그 방식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왔었던 길이 이제는 끝났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는 본인이 결정해야됩니다.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기준은 결국 어느 쪽이 더 이익이 되는가, 어느쪽이 우리에게 안정을 줄 것인가, 어느쪽이 지금까지의 관행이나 방식보다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겠는가에 지향점을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활동을 집중해야되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 문장으로 철두철미한 그리고 치열하게 집중하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단순히 보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주시하라, 단순히 듣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경청하라, 또한 단순히 써서 없에는 것은 부족하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도록 활용하라.”

 

보고, 듣고, 고민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냥 쳐다보거나 건성으로 듣지말고 집중해서 그 의미를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자 35장은 이제 것 이야기하였던 모든 道는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강조함과 더불어 치열하게 무엇이 진짜 원인이고 어떤 것을 움직여야되는지 그리고 그 지행점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4장

2022. 3. 15. 14:15 from BoOk/pHiLoSoPhY

大道氾兮 其可左右

대도범혜 기가좌우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常無欲 可名於小

상무욕 가명어소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이기종부자위대 고능성기대

 

 

 

노자도덕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道와 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道라는 것이 단순히 방도를 가르키는 단계에서는 道에 대한 가치 평가가 주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야기한 바와 같이 좋은 道도 있을 수 있고 그냥 그런 혹은 나쁜 道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여러 생각해낼 수 있는 道 중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하거나 나은 방도를 채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가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인지, 구성원 대다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德이라는 가치 개념이 더해지게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大道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大道氾兮 其可左右

큰 도는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 좌우를 가리지않고 모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넘치게 되면 그 물은 어느 특정 방향만으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에 그 그릇이 놓여있는지에 따라 방향에 정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방으로 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大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일단 발현이 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즉 그런데 이건 꼭 좋은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둬야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악법이 있다고 하죠. 아니면 선의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악영향을 미치는 법일 수도 있고요. 모든 국민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게됩니다. 이 역시 大道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특정 인원들 혹은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가 악영향을 입게된다면 결국 그 피해를 중장기적으로는 피할 수 있는 집단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34장에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大道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중 긍정적인 의미의 방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받아들임에 사양함이 없다.”

 

“辭”라는 단어는 설명하다 혹은 사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 문구의 주어인 만물이 아니라 “道”를 혹은 그러한 “道”를 실현하는 사람, 즉 군주를 주어로 인식하여 뒤의 세단어로 이루어진 문구를 해석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만물이 大道에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大道는 이러한 역할을 함에 사양함이 없다,라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왜 군주가 사양을 한다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않고,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大道를 부끄럼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두번째 문장은 결국 첫 문장에 언급한 大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는 물이 넘치듯 이미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그 구성원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고, 그래서 구성원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삶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이야기죠.

 

그러므로 노자에서의 大道는 어떤 거대한 담론을 의미하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은 방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거대담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활화가 되어버린 도구나 관습, 법률, 이론 등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죠. 각 나라마다 수를 표기하는 방법은 각각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0, 1, 2, 3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로마자나 한자로 수를 표기하지는 않습니다.

 

功成不名有

이름이 있지 않은 곳에, 즉 소외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상에 대해 성과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이러한 大道는 어떤 기본적 자세를 가지고 진행되어야 할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萬物 즉 많은 영역이나 대상을 아우르는 방안이 大道라고 한다면, 노자는 그 노력이 지금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아니면 미지의 영역이었던 곳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기존의 방안을 제 아무리 갈고 닦아본들 이미 수혜를 받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용이 되고 있던 대상에서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리되지 못했던 즉 여기서 ‘不名’이라 표현된, 즉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르게는 무언가 큰 한방을 (여기서 말하는 大道) 만들기 위해라면 뭔가 큰 담론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직 미비한 구석이 없는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살피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첫장에서부터 말하듯이 모든 이슈에 대한 해결방안은 혼돈 상태인 無로부터 시작합니다. Chaos 상태에 이름을 주고 (대상을 한정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질서를 부여하는 시작점이니까요.

 

이 문구는 다르게 생각하면 통치라는 것은 아직 손길이 닿지않은, 소외받은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방안을 만드는 것이 이미 충분히 가진 대상들을 위한 것이 된다면, 사회의 균열은 가속화될 것이고 분쟁이 증가하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향평준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한선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통해 사회 전반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 아닐까요?

 

衣養萬物而不爲主

“(중요한 것은) 가능한 많은 대상을 입히고 키우는 방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떠한 특정 대상을 위주로 그 대상만을 위한 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의 연결선상에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 즉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대상에 (萬物) 혜택을 입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지, 특정 대상이나 과제 위주로 돌아가서는 그냥 실행방안에 그치지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내년 영업전략을 짠다고 해보죠. 여기에는 자사, 경쟁사 그리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망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 분석부터 시작하여 자사가 가지고 있는 전체 제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분석과 그 각 제품에 대해 회사 전체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되는지에 대한 의견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잘나가는 특정 제품 위주로 아니면 담당자 본인이 잘 아는 영역에 국한하여 내용이 작성된다면 그걸 회사의 전체적 운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大道 즉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이나 방안을 세우려면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常無欲 可名於小

일상적으로 무언가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점을 찾다보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대상에 대해서도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분석하게된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노자는 큰 방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조그만 이슈들부터, 그리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기본이 되는 것들부터 名 즉 규정되어야 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常無欲이라는 문장은 이미 1장에서도 나왔던 이야기 입니다. 常無라는 것은 결국 항상 무관심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하고 내팽겨둔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냥 그런채로 혼돈의 상황에서 오랜시간 머물러있든 것들을 말하는 거죠. 이러한 대상들부터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되면 (欲) 작은 대상에 대해서도 (於小) 규정을 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 즉 Naming이 진행될 수 있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可名)   

 

조금 의미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냥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구석의 골목부터 쓰레기를 치우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다보면 동네 전체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별 것아니라고 흉물을 방치해 놓으면, 그 영향이 주변 전체에 미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이른바 깨진 유리창의 영향이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이야기가 여기에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을 넓게 돌이켜보고 어느 특정 대상이나 상황 위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가히 큰 방안을 지향한다 이야기할 수 있다.”

 

“歸”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돌아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물이 어떤 道로 돌아와 모여든다, 즉 소속된다는 해석들을 많이 보는데요. 이보다는 여기서의 歸라는 글자는 歸納法 등에서 쓰이는 의미와 같이 무언가 해답을 내기 위해 기본이 되는 현상들을 돌이켜 본다 또는 두루 고려한다 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앞의 첫 네 글자의 의미는 만물 즉 모든 경우의 수를 돌이켜 고려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요, 뒤에 이어지는 不爲主라는 말은 특정 현상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어느 특정 현상에 매몰되거나 치우지지 않고 전반적인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살피고 고려해라, 그래야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이야기겠죠. (可名爲大) 일을 함에 있어 detail을 챙기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可名於小라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놓쳤던,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세세한 것들까지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이고, 그 범위도 어느 특정 부분만이 아닌 전만적인 내용을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라면, 일을 함에 있어 굉장히 치밀해야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결국 자신을 높이려하는 것을 우선시 하지 않아야 능히 큰 도를 이룩할 수 있다.”

 

‘以其終’이라는 말은 중국어로 ‘결국에’라고 해석이 됩니다. 결국에라는 말을 쓴 것은 앞에 경계한 일을 진행함에 위주로 하지말라는 대상이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자신의 편견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무언가 진행해서는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힘들다는 것이죠. 즉 이기적인 의도를 배제하는 것이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3장

2022. 2. 18. 10:15 from BoOk/pHiLoSoPhY

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부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33장은 매우 평이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도 딱히 지도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33장은 내용을 전체적으로 한번에 해석하고 시작하겠습니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자를 지혜롭다하며,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사리에 밝다고 한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상대방을 이겨내는 사람을 힘이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는 사람은 강하다 한다. “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만족함을 아는 사람을 부유하다 하며, 강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그 기반을 잃지않는 자는 오래 가겠지만, 죽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이다.”

33장은 각 문장마다 다소 대치되는 상황을 대치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것도 좋지만 뒤의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은연 중에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나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인지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이야기 한 이후, 하지만 정작 알아야할 것은 나 자신이 정말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알아야 明 즉 정말로 이치에 밝다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두번째 문장도 비슷합니다.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금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겨내는 자가 정말로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단지 남을 꺽는 것에 힘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써야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은 서로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문장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부유하다고 하는 것은 이쯤하면 되었다라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은 어쩌면 미덕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 두문장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의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쇄신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의 굳은 의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단순히 오래가기 위해 나의 기반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위치에 있지않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면 그것이 진정한 오래감이 아닐까, 라고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합니다.

33장의 내용은
1) 나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판단하고,
2) 그 문제를 이겨내려는 방안을 마련하며,
3)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개선 추진하여야 한다
4) 또한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단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없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라고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2장

2022. 2. 16. 13:34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상합 이강감로

民莫之令而自均

민막지령이자균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知止 可以不殆

지지 가이불태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방도가 있더라도 그 이름이 없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미미한 문제일지라도 천하는 이를 다스릴 수 없게된다.”.

 

노자의 첫장을 여기서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名은 Naming, 즉 대상을 규정하는 절차로 해석한다면, 32장의 첫 구절 ‘道常無名’, 즉 이름이 없는 방도라는 것은 여하한 이유로 채택되지 않은, 그러므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방도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간혹 ‘도는 영원하지만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멋있어 보이는 해석이긴 하지만.. 무슨 말이죠?)

 

좀 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죠. 예를 들어 차도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주변을 살피고 보행자의 판단 아래 눈치껏 건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모든 도로에 지하도나 육교를 설치하는 방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신호등을 설치하여 빨간불이 나오면 서고, 파란불이 나오면 건너가는 걸로 약속을 정할 수도 있고요. 이것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안이 10가지, 20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어느 방안을 채택할지 고민을 하게되죠. 아무튼 채택되지 않은 방안들은 모두 ‘道常無名’ 즉 규정되어지지 않은 (즉, 채택되지 않은) 방도가 되게되는 겁니다.

 

‘樸雖小’ 소박하고 비록 작은, 즉 아무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天下莫能臣也’ 세상사람들은 다스릴 수 없게됩니다. 생각해보시죠. 길 건너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방안이 없다면 이 쉬운 이슈도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게됩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지도자가 만약 이를 (만들어내어) 지켜낸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찾아들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경우 여러 방도 중에 합당한 방도을 선택하여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군주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주변의 의견을 물리치고 현실에도 맞지않는 방도를 독단적으로 수립하여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최적의 방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조금 더 보완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萬物將自賓’ 이런 지도자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즉 모이게 된다는 말이겠고요.

 

문제가 눈 앞에 닥쳐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뭉게고 아무것도 안하는 리더들을 종종 보곤합니다.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문제를 대응하는 것이건 아니면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건, 여러 방안 중에 결국 하나의 방안을 채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리더의 몫입니다.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가 서로 간에 화합하면 감로가 내리게된다.”

 

이 문장은 앞의 28장의 내용에 연결선상에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서로 알맞은 조합을 통해 개선방안을 채택하게되면, 여름철 내리는 단비와 같이 구성원들이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民莫之令而自均

사람들이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따르게 된다."

 

어떤 사회에 제도나 풍습, 관습 등도 그 구성원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도가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방도와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취지를 공감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도도 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 취지에 공감하고, 효과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방도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된다면 누가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는 것은 잠시 기다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을 누가 따로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희미해도 차를 몰면서 중앙선을 지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새로운 제도를 시작하면 이름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이름 또한 언젠가는 다함이 있다. 뭇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앞에서 새로운 대안이나 방안을 제시하는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면, 지금부터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노자는 여기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Originality를 영원히 유지시키는 제도도, 법칙도, 관습도 있지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통용되는 방안이 언젠가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끝날 것음을 경험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라도 알고 있습니다.

 

知止 可以不殆

멈출 때를 알면 가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기존의 것을 멈춘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이대로 타성에 젖어 기존의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냥 하던 데로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관습에 안주해서는 어느샌가 위기에 처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변의 국가들은 소총병으로 변모하는 시대에 장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에 안주하는 나라가 있던가고 생각해보시죠. 그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기존의 제도나 세력이 강고하게 자리 잡았더라도 변화가 눈앞에 다가왔다면 변해야합니다. 아니면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유하자면 천하의 道라는 것은 마치 강과 바다로 흐르는 물줄기와 같아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라는 것은 계속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끝임없이 적응해야되며 나도 변화해야 합니다. 안일하게 기존 방식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만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 하며 노자는 32장을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1장

2022. 1. 18. 16:27 from BoOk/pHiLoSoPhY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부가병자, 불상지기, 물혹악지, 고유도자불처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군자거즉귀좌, 용병즉귀우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부득이이용지, 염담위상, 승이불미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이미지자, 시락살인. 부락살인자, 즉불가이득지어천하의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길사상좌, 흉사상우. 편장군거좌, 상장군거우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언이상례처지, 살인지중, 이애비읍지. 전승이상례처지
   
31장의 내용은 앞장의 내용이 이어진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은 그 폐해를 들어  선택해서는 안되는 방도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무릇 훌륭한 군병이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도구이며 의혹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안이 있는 이는 군병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첫 구절은 명확하게 군대는 대안이 있다면 사용해서는 안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 표현을 쏟아냅니다. “상스럽지 못하다 - 不祥之器”로 시작하여, "만물이 의혹을 품고 증오하는 대상이다 - 物或惡之”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故” 다른 대안이 있는 사람은 “有道者” 군병을 사용하는 선택지에는 머물지 않는다, “不處” 즉 그런 방안은 채택하지 않는다 이야기 합니다. 
 
어째서 이러는지는 앞장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봅니다. 폭력은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하는 방안으로 비춰져, 지도자에게는 매력적인 대안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그 속성상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죠.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군자는 머무름에 그 왼편을 귀히 하나, 군대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때에는 그 오른편을 귀이 한다.”
 
이 문구는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군왕이 신하들을 모아 국정을 논할 때, 그 왼편에는 문관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무관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임금이 남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던거죠. 조선시대 때 양반이라는 말이 동반 (문관)과 서반 (무관)들을 가르키는데, 위의 전통을 따른 작명법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문관은 동쪽에 배치하고 무관은 서쪽에 배치하였을까요?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쪽이며, 서쪽은 해가 지는 쪽입니다. 전쟁은 대비는 해야될 것임에 분명하나, 막상 벌어지면 국운이 저물 수도 있는 행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위의 두번째 문장은 이러한 내용을 가르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군병은 상스럽지 못한 도구이다. 군자의 도구라 할 수 없다.”
 
첫번째 문구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군자가 먼저 사용을 고려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부득이한 경우가 생겨 군병을 사용하더라도 평안하고 고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승리하였다 이를 미화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 설명할만한 내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군병을 사용하는 것은 침략을 당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야되고 이 경우에도 냉철한 판단 아래 꼭 필요한 부분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철저히 수립하여 신중히 진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또한 설사 승리하였더라도 전쟁 자체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이를 미화해서는 안된다 이야기 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 이런 노자의 생각은 현대의 지도자 그 누구도 실행하지 못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말라하였는데, 이를 따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요? 수많은 군병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끌려나가 전쟁에서 죽고나면, 국가는 그리고 지도자들은 그들의 희생을 용맹으로 포장하고, 국가를 위한 헌신으로 미화합니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지도자라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경우라면 전쟁을 억지하고 방지하며, 군대를 그 목적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전쟁을 미화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서 뜻을 얻을 수 없다.”
 
전쟁을 일삼는 군주는 살인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뜻을 얻을 수 없다합니다. 자기 자신도 결국 파멸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길한 일에는 왼편을 높이며, 흉한 일에는 오른편을 높인다. 편장군은 왼쪽에 위치하며, 상장군은 오른편에 위치한다.”
 
첫 두문구는 이미 두번째 줄에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군은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도 그 책임의 무거움을 항상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직급인 편장군은 상서로운 왼편에 위치 시키되, 고위 상장군은 오른편에 둔다 이야기 합니다.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말하자면 전쟁은 상을 치르는 예를 따라야하는 것이니, 뭇대중을 살해하였다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한다. 전쟁에 승리하였더라도 이는 상례로 처리하여야 한다.”
 
전쟁의 수많은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군과 적군 모두 희생이 발생되기 마련이고, 수많은 민간인들도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희생당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는 마치 우리의 앞에는 승리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리고 희생은 오로지 적국에게만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국도 상대적 약소국인 베트남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이라크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우었었고, 또 치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국이라는 이름으로 가리워진 상대국의 선량한 일반 대중들이 영문도 모른체 희생당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전쟁 승리가 환호할 만한 일일까요? 노자는 전쟁은 초상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야기 합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전쟁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야할 일이지, 미화하고 환호할 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