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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17 노자도덕경 21장
  2. 2021.01.13 노자도덕경 20장
  3. 2020.12.31 20년 독서 리스트
  4. 2020.11.09 노자도덕경 19장
  5. 2020.11.02 노자도덕경 18장
  6. 2020.10.30 노자도덕경 17장
  7. 2020.10.15 노자도덕경 16장
  8. 2020.09.16 3.
  9. 2020.05.02 노자도덕경 15장
  10. 2020.04.17 노자도덕경 14장

노자도덕경 21장

2021. 3. 17. 18:14 from BoOk/pHiLoSoPhY

孔德之容, 惟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활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中甚眞, 其中有信.
기중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자고급금, 기명부거, 이열중보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오아이지중보지위재, 이차
 
 
21장의 첫 글자는 孔입니다. 孔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로 쓰여진 걸까요? 사전을 찾아보면 구멍이라는 뜻으로 가장 먼저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뜻도 몇몇 있는데 크다던가, 헛되다, 통한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孔이라는 단어를 11장의 無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孔德之容이라는 첫 네 글자는 “비어있음의 덕은 받아들임 (수용함) 에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네 글자로 더욱 비움의 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惟道是從 “오로지 도는 이를 따른다”라는 것이죠. 첫 단원은 결국 비움의 미덕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이며, 왠만한 Solution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道는 다시 이야기 하지만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는 곳에 형성되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大道無門이라는 말은 큰길에는 일종의 검열 역할을 하는 Gateway 즉 門이 없다는 의미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나의 의지를 투영하려고 고집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수용할 수 있는 빈공간 또는 Play Ground를 만들어주면 그 다음 자연이 해결책과 새로운 Idea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道之爲物, 즉 구체화된 뭔가를 (物) 만들어내는 (爲) 길(道)이 되는 것이죠. 
 
다음 세문장에 恍과 惚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쓰여집니다. 황홀하다라고 해석될 수 도 있는 이 두 글자는 이 경우 앞서 14장의 夷, 希, 微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상황이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말이죠.
 
전체적인 현상만으로 방안을 수립하려 하는 상황는 막연하고 막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차분이 수용하다보면 대상을 명확화할 수 있고 (象), 모호했던 것이 구체화되고 (物), 일을 추진하는 동력을 형성하게 되며 (精), 깊이 진실된 마음들을 모을 수 있고 (眞), 구성원들의 믿음도 확보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信)
 
이 모든 절차의 기본은 孔, 즉 나의 Bias가 반영되지 않은, 그것을 비운 수용하는 자세에 있다고 본 것이죠.
 
마지막 두 문구는 수용하는 자세가 오래토록 검증된 道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로 보았습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즉,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不去) 정의 (名)라는 것은 덧붙여 설명하자면 오래살아남은 절차나 제도, 문화는 일반 대중들의 (衆甫) 교열 (閱), 즉 집단지성의 검증을 거친 대상들이라는 것이죠.
 
오래 살아남은 이름이나 방식, 습관, 문화는 결국 한 위대한 위인의 갑작스런 발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그 구성원들의 반복된 정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라는 마지막 말은 이를 강조해 표현한 것으로 “내가 어찌 사람들의 상태를 알겠는가, 이로써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그 대중의 문화나 습관은 그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문화나 관습을 보면 그 구성원들이 거쳐온 역사와 환경, 그리고 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0장

2021. 1. 13. 13:42 from BoOk/pHiLoSoPhY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선지여악, 상거하약. 인지소외, 불가불외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형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기미조,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여상아지미해. 내래혜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요혜사무소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도덕경 20장은 絶學無憂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배움을 끊으면 근심할 바가 없다라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또는 공부 해봐야 근심거리만 되므로 그냥 속 편하게 살도록 배움을 멈추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노자의 철학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絶學無憂라는 말은 배움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되며, 눈 앞에 재앙이 다가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뒤의 문장을 보면 이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唯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공손히 대답하는 말”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阿라는 단어는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唯之與阿, 相去幾何라는 말은 공손하게 또는 친근하게 상대방에게 이야기 하는 것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가, 즉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한거죠.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칠 것이고, 결국 이 배움을 바탕으로 어른들에게는 존대를 하게 됩니다. 배우지 못한 아이 때는 주변 사람들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더라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남발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이 문장의 더 가까운 뜻은 어느 경우에 또는 어느 대상에게 공손해야 되며, 어느 사람이나 경우에 상대방에 친밀하게 대하여도 되는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라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결국 배움이 중요한 거죠. 배움이 부족하면 경계에 대한 구분도 합리적이지 못할 수 있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善之與惡, 相去何若라는 말도 선과 악이 때로는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경계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악에 발을 담그게 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人之所畏, 不可不畏라는 글에서 之라는 단어는 有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대상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직역되는데, 이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 심각성을 인지 못하면 아무리 큰 재앙이 코 앞에 닥쳐도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문구입니다.

 

다음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荒兮其未央哉, 거칠고 어두운 재앙이 아직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닥치지 않은 상황에서는)

衆人熙熙 사람들은 희희낙낙합니다.

如亨太牢 그냥 고기 굽고,

如春登臺 봄날 전망대에 올라 즐기 듯 말이죠.

我獨泊兮其未兆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견하는 나는 (노자는) 홀로 아직 닥치지 않은 이 징조를 초조한 마음으로 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어지는 如嬰兒之未孩라는 말은 아직 어린아이도 못된 간난아기로 해석하였습니다. 뒤이은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게으르고 게으르니 사람들이 여유가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은 향하는 바가 없다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목적이 없다라는 뜻으로도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겠고요. 바라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없이 지내게 되면 결국 그 나태함의 대가가 후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그 시간에서의 안락함에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이 두 문구는 마치 굴원의 ‘어부사’를 생각나게 하는 문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입으로 닥쳐오는 위기를 무시하면, 이를 알고 있는 나는 홀로 버려져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게된다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나머지 문구는 노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에 문장별로 해석하려 합니다.

 

沌沌兮, 나는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지는데

俗人昭昭, 사람들은 모두 총명한 것처럼 굴며 나를 대하고

我獨昏昏, 나는 어찌 이 위기를 헤쳐나갈지 혼란스러운데

俗人察察, 사람들은 통찰력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대수롭치 않게 여기며,

我獨悶悶, 나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데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衆人皆有以,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이를 보아 바다와 같이 담담하고 바람소리와 같이 거칠 것이 없게 보인다.

而我獨頑且鄙, 오직 나만이 고집불통이어서 쓰일 곳 없이 되었으니,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귀히 여겨서다.

 

거의 대부분 우리 속담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마지막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는 말은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위기에 대해 내가 근심하는 것은 결국 나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안위와도 연결이 되어서, 그리고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모를 대표적으로 표연하여 타인의 안위가 이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지않을가 하는 것이 자신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들기위한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20장의 이야기는 배움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움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위기에 대한 인식 능력은 결국 배움에서 비롯되며, 걱정없이 되는데로 살다보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하게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 하는 것이 20장에서 노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Posted by Tony Kim :

20년 독서 리스트

2020. 12. 31. 22:07 from BoOk

1.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2. 권력의 법칙
3. 광장/구운몽
4. 제국대학의 조센징
5. 스위밍레슨
6. 제1차세계대전
7. 서부전선 이상없다
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9. 성과 속
10. 죽음이란 무엇인가
11. 유신 - 오직 한사람을 위한 시대
12. 파시즘
13. 노멀피플
14. 카탈루니아 찬가
15. 가재가 노래하는 곳
16. 프랑스 혁명사 1권 - 대서사의 시작
17. 프랑스 혁명사 2권 - 1789
18. 1차세계대전사
19. 프랑스 혁명사 3권 - 진정한 혁명의 시작
20. 이기적 유전자
21. 듄1
22. 퀀텀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9장

2020. 11. 9. 11:07 from BoOk/pHiLoSoPhY

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성기지 민리백배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차삼자이위문불족 고령유소속

見素抱樸 少私寡欲

견소포박 소사과욕

 

노자도덕경 19장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 뭔가 규율이나 강제할 수 있는 논리들을 (聖, 智, 仁, 義 등) 없애면 민중들이 알아서 잘하게 된다라는 식의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하기만 그런 논리라면 앞장에서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던 孝慈라는 문구가 여기서는 왜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는지 앞뒤가 않맞는 느낌을 받게됩니다.

 

저는 19장의 첫 3문구는 뒤의 내용을 지향점으로 해서 앞의 행동을 진행하라는 식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앞장에서 잔가지가 아닌, 근본적 개선에 대한 강조를 하였다면 그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한다라는 구조로 말이죠. 이 경우 첫 세 문구는 아래와 같이 해석됩니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성기지 민리백배)

백성들의 이익을 백배로 늘릴수 있는 방향이 되도록 기존에 떠받들던 성스러운 것을 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지혜를 버려야 한다.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사람들이 효와 자애로움을 다시 되찾도록 기존에 어질다고 생각했던 행위와 의로움의 기준을 폐기하고 근본부터 다시 수립해야한다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나라에 도적들이 없어지도록 교묘하고 이익이 나올 여지를 찾아 없애야 한다.

 

絶聖으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어찌보면 맹자의 역성혁명의 근거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스러운 것들, 그리고 떠 받드는 지식들의 존재의 근거는 그리고 그 시작은 백성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자는 것이었다지만 시간이 지나며 주객이 전도되어 왕조나 종교가 그리고 이론이 主가되는 경우가 인류 역사에는 허다합니다. 노자 19장은 지금의 질서가 결국 그 근본에 배치되는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잘라내야된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성서럽게 받들던 왕조일지라도, 지혜로운 것으로 떠받들어지던 철학이나 종교일지라도, 어진 것으로 의로운 것으로 떠받들여지던 관습들도 이러한 체계와 절차와 이론들이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되어 그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나라의, 사회의 도적들이 법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그 허점을 찾아서 보완해야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이상에만 치우치지 말고 현실적인 실무적인 부분도 치밀하게 살펴야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행위는 책상에 앉아 문구나 서류로서만 집행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此三者以爲文不足) 마땅히 소속된 사람들에 대해 직접 그 명령을 수행해야된다고 말합니다. (故令有所屬)

 

그리고 이러한 개혁활동은 소박한 사람들을 찾아 그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見素抱樸), 또한 나의 개인적 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少私寡欲)

 

 

개혁의 진행방향은 우리가 성스럽게 떠받들던 것들과 지혜로서 우러러보던 것들이 사람들의 이익에 기여하는지 살펴봐서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과감히 이를 떠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仁과 義의 도덕적 관념이나 관습들도 더 이상 변화된 세상에 기능을 못하는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면 이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사람들이 효와 자애로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을 찾아봐야 한다.

기존의 절차나 체계들을 더 정교히 하고 인센티브를 부여하여도 이는 부질없는 일이 될 뿐이라면 말단을 개선하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 이에 빌붙어 세상을 좀 먹는 도적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행동은 책상머리에 앉아 문서로만 공포해서는 아무리 좋은 내용도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 소속된 집단에 직접 참여하여 새로운 령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개선활동의 또한 근본 목적은 사회의 소박한 일반대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의 개인적인, 일부 특권층의 욕심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8장

2020. 11. 2. 10:46 from BoOk/pHiLoSoPhY

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

대도폐 유인의 지혜출 유대위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육친불화 유효자 국가혼란 유충신

 

노자도덕경 18장에 대해서 많은 경우 이상적인 세상에서의 큰 가 없어지고 나니,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큰 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인의 같은 것들이 강조되었다는 식의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내용도 조금 다르게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존의 사회체계가 송두리째 바뀌게되는 일이 발생되곤 합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으로 수백년간 굳건하게 자리잡았던 전제 군주정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들어서게 됩니다. 공화정이 그렇다고 한 순간에 프랑스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간의 물리적, 이론적 공방이 이어졌었고, 때로는 군주정으로 역행하는 시기들을 거치고야 공화정 체계가 확립되게 됩니다.

 

여기서 大道廢라는 말은 그래서 가장 상위의 큰도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 (이렇게 해석하면 1장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는 없다라는 말과도 배치된다는 것도 감안해야됩니다..) 기존의 큰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개혁과 혁신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이나 용도폐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 닥쳐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겠고, 선견지명이 있는 경우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방안을 수립하는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리고 그런 의문이 있은 이후에 무엇이 옳은 것 (仁義)이고 어떤 것이 더 현명한 방안(智慧)이며, 지금까지 당연한 듯 행했던 일들 중이 어떤 것이 잘못된 것(大僞)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게 되면, 예를 들어 육친이 (부모, 형제, 자녀) 불화하게 되면 누가 그제서야 효자였었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는지를 알게되며, 국가가 위기에 처해서야 진짜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하였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종합하자면 노자도덕경 18장은 무언가를 개선하려면 말단에 머물기보다 근본적 부분까지 개선을 고민해라, 그래야 무엇이 남길 부분이고, 무엇이 근본 이슈였는지 알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그냥저냥 좋은게 좋다고 덮고 지나가다 보면 누가 정말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는지, 누가 정말 나를 생각하는 자식이었는지, 그동안 나의 눈을 가리고 임기응변과 감언이설로 조직에 암적인 역할을 하던 사람과 절차를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는 거죠.

 

흔히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18장에 가장 적합한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전까지 의문을 품지않고 적용되었던 Rule이 그 수명을 다하게되면,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마땅하고 옳은 방안이 드러나게 된다. 새로운 지혜가 나오게 되며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었는지도 드러나게 된다. 마치 가족간에 불화가 생기고서야 가족 중 누가 효자이고 어진 어른이었는지를 알게되는 것이며, 나라가 혼란에 닥쳐서야 충성스러운 신하가 누구였는지를 알게되는 것과 같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7장

2020. 10. 30. 11:29 from BoOk/pHiLoSoPhY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태상 하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유혜 기귀언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많은 책에서 노자도덕경 17장을 지도자와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뭐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등으로 말이죠.

 

하지만 비록 노자가 쓰여진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있는지 정도만 사람들이 아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직생활을 경험한 분들이라면 이런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세상 만사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통한 생존과 발전을 위해 리더는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같이 고민하는 자리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16장의 연장선상에서 17장은 Rule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들은 1년이 365일이고, 하루는 24시간이며, 지구는 태양 주변을 1년 주기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감기에 걸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않은 바이러스 때문이고, 강한 햇볕 아래 오랫동안 있으면 자외선으로 인해 피부가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되는 것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0의 개념을 대부분 알고 있고, 자신의 키를 cm 단위로, 몸무게는 kg 단위로 알고있거나 이따금씩 살펴보죠.

 

“太上 下知有之”라는 말은 이러한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공인되어 당분간은 논란이 없고 변할 듯 싶지 않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게되는 그런 법칙말이죠.

 

사람들은 문제에 봉착하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대응책들은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내놓은 대응책은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노자 17장의 내용은 가장 높은 것이 그것이 법칙이었다는 것조차도 인식 못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며 (굳이 또 예를 들자면 빨간불에서는 신호등을 건너지 말자는 것 같은?), 그 다음은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진 법칙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열광하는 것이며 (親而譽之), 세번째 순위는 사람들이 그 법칙을 어길 경우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畏), 그 다음은 그런 법칙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하는 것, 심지어는 경멸하는(侮) 것이 된다고 보는 거죠.

 

국가나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규칙이나 Rule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합리함을 느끼는데도 그러한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받게될 징계나 질책이 두려워 따르는 경우도 있고요.

 

“信不足焉 有不信焉”이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적용하고 있는 Rule에서 개선의 대상이 어느 것이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아닐까 합니다. 조직에 적용되고 있는 어떤 Rule이 있는데 그로 수반되는 문제도 많고, 의구심이 생기게 되면 (信不足), 이 Rule에 대해서는 심할 경우 사람들이 신뢰를 하지않게되는 것이고 (有不信), 이것이 개선되어야할 법칙이 되는 것이죠.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라는 문구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조급하지 않게 (悠兮) 진행하며, 신중히 그 의견을 개진하여 (其貴言),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지향점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수준까지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百姓皆謂我自然)

 

노자의 1장을 생각하면 모든 법칙이 영원할 수 없다라고 전제하였지만, 어차피 바꿀거 대충 Rule을 만들거나 적당히 하자라는 의미가 아님을 17장에서 말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좋은 완결성을 갖춘 법칙을 지향하여 고민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그 이후에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모든 기존의 성과에 대해서도 더 개선할 점이 없는지를 생각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노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로 생각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6장

2020. 10. 15. 10:38 from BoOk/pHiLoSoPhY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앞장에 본 바와 같이 虛라는 말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빈 공간을 말하기 보다, 최소한의 약속된 Rule이 적용된 활동 무대라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靜이라는 말은 이러한 무대를 제공한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무대가 크면 클수록 (虛極) 더 많은 의견과 생각이 도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제공한 사람은 가능한 (절대가 아니고) 그 무대를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한다면 (靜篤), 그 무대에서 만물이 다시 말하면 다양한 성과가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얻어질 것이라는 말이죠.

 

조금 더 부언하자면 저는 靜이란 말이 그냥 방치하고 입을 다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섭은 최소화하되, 필요한 경우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한다는 의미를 복합적으로 담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흙탕물을 빈(虛) 유리병에 넣은 후 흔들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靜) 시간이 지나 부유물은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위로 뜨게됩니다. 아무튼 그 유리병에 물을 담고, 흙탕물이 안정화되도록 인내를 발휘하는 것은 노력이 수반되는 행위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아니죠.)

 

이러한 노력 끝에 그 혼돈스럽던 상황이 정리되고 무언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얻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이 정립하게 되는 다른 문제해결의 바탕(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고민하여 더하기나 빼기, 나누기와 곱하기 같은 수학공식을 만들어낸다면 이런 이론이 더 발전된 수학 이론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게된다는거죠. 이러한 과정을 도덕경에서는 復이라는 단어로 압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선순환과 같은 의미로요. 눈으로 보이는 현상은 혼란스럽고 다양하지만 (夫物芸芸),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질서가 잡히고 또 다른 질서 수립을 위한 바탕이 되게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첫번째 문구는 이미 이야기한 내용의 반복이 될 것 같습니다. (歸根曰靜)

그런데 다음 두 문구가 다소 재미있습니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靜이라한다, 이를 일컬어 復命이라하며, 復命을 常이라 한다”

 

復命의 사전적 의미는 업무를 마치고 그 위의 사람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常에 대해서는 이리 첫장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첫장에서 常이라는 것은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구불변한 진리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므로 이번 내용에서의 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존의 것을 대치하던 아니면 새롭게 수립된 기준이나 법칙, 이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혼돈된 상황을 정리하여 (靜), 이를 정리하여 구성원이나 리더의 합의를 이루는 단계를 거치면 (復命) 이후 이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죠. (常)

 

그리고 이러한 기준을 체득화하여 알게되는 것을 (知)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明) 이미 수립된 아니면 알려진 기본적 내용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일을 망치게 된다고 노자는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이번 단원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사람들(公)에게, 그리고 王에게, 그리고 천하에 받아들여지면 (容) 이것이 새로운 질서인 道가 되는 것이고, 새로운 질서가 안정적이고 오래토록 유지된다면 종신토록 (아마 제후를 가르키는 듯한데) 나라에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도 보고, 조금 다르게 해석하자면 常을 알게된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고, 이러한 질서가 공공에서 영구한 질서로 더욱 발전하게 되면 그 이론 자체가 그 단계에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는 첫번째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3.

2020. 9. 16. 13:05 from MeDiTaTiOn/pOeM

문득 니 생각이 나곤 해

동네길을 걷다가...
버스 창 밖을 쳐다보던 중에...

불현듯 니 생각이 날 때가 있어

너는 이제

사라진 장소가 되었고
연주가 끝난 음악과도 같은데

나는 이제

너를 생각해도 더 이상
슬프지도 아쉽지도 기쁘지도 힘들지도 않게 되었는데

그냥 말로 하긴 좀 어려운
그런 기분이 들기는 해

니 생각이 날 때 너의 모습이 그냥
웃고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어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5장

2020. 5. 2. 11:52 from BoOk/pHiLoSoPhY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심불가식.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豫兮若冬涉川, 예혜약동섭천,

猶兮若畏四隣. 유혜약외사린.儼兮其若客, 엄혜기약객,

渙兮若氷之將釋, 환혜약빙지장석,敦兮其若樸, 돈혜기약박,

曠兮其若谷, 광혜기약곡,

混兮其若濁. 혼혜기약탁.孰能濁以靜之徐淸. 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動之徐生. 숙능안이동지서생.保此道者, 不欲盈. 보차도자, 불욕영.

夫唯不盈, 故能蔽而新成. 부유불영, 고능폐이신성.

 

첫 줄의 선비 士자가 나옵니다. 뭐라고 해석을 하던지 엘리트 계층을 지칭하는 명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엘리트 계층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요? 폭 넓은 지식을 보유하고, 누구보다 먼저 위기를 감지하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답을 내놓고,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요? 앞에서 보았듯 노자는 소수의 섣부른 판단과 선택을 경계하는 모습을 시종 견지합니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예로부터 더 나은 방안을 만들어 내려했던 선비들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면 통할 수 있는 (이에 걸맞는) 해결책을 찾아야했습니다.

 

深不可識. 심불가식.

 

그러나 어떤 경우 이제까지 경험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가늠하기 어려운 심오한 문제에 마주하게되기도 합니다. 개인이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였더라도 그 지식의 한계는 있게 마련입니다. 운 좋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문제를 마주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본인의 경험에 의존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이렇게 본인의 능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마주하게되면,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리거나 이미 나와있던 방식들을 담아내고, 적용하는 방식으로 방향 전환하여 문제 해결을 시도해보게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큰 회사의 임원이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주어진 업무를 혼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업무의 양도 양이겠지만 임원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고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대개의 경우 임원은 조직의 전문가들을 어떻게 효율적인 곳에 배치하여 업무가 원할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하며, 중요한 의사결정도 전문가 조직과의 토론과 협의의 결과에 준해 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夫唯不可識 즉, 혼자서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죠.

 

 

더더욱이나 조직의 모든 사람들이 생소한 문제에 봉착하겠된다면, 신중에 신중을 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다른 문제에 적용하는 방식을 적용해본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 방식을 그냥 가져다 부족하던 말던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던지, 아니면 응용을 목적으로 채택해야되는 경우가 더 많을테니까요. 

 

豫兮若冬涉川, 예혜약동섭천,

 

예측함에 있어 겨울날 강 위를 걷듯 선택에 조심하며

 

猶兮若畏四隣. 유혜약외사린.

 

일을 착수하고 움직임에 있어서는 모든 Risk 사항을 살피게 됩니다.

 

儼兮其若客, 엄혜기약객,

 

또한 삼가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함은 마치 손님을 대함과 같이 합니다.

 

이 다음 문구들은 아래의 내용은 저에게는 마치 Brain Storming의 과정을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渙兮若氷之將釋, 환혜약빙지장석,

 

부드러운 모습은 마치 얼음이 녹아 풀어지듯 하라는 의미인데, 저에게는 조직의 일원으로 녹아들어가라는 의미로 읽혀졌습니다. 아무리 본인이 Leader의 입장이라도, Brain Storming 과정에서는 동등한 구성원의 하나로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다른 사람들이 염두에 두도록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눈치만 보게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자유로운 의사 개진은 이미 어려워지게 될테니까요.  

 

敦兮其若樸, 돈혜기약박,

 

도탑기로는 나무 둥지와 같으며

 

曠兮其若谷, 광혜기약곡,

 

계곡과 같이 많은 것을 포용하고

 

混兮其若濁. 혼혜기약탁.

 

사회에서 꺼리는 터부까지도 모두 고려하여, 해결책의 방편으로 포함합니다.

 

孰能濁以靜之徐淸. 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動之徐生. 숙능안이동지서생.

 

앞에 나왔던 上善若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이 경우 다시 생각나게 됩니다. 물은 온갖 더러운 것들은 쓸어담아 그것을 한곳에 고이게도하고, 쓸려내려가게도 합니다. 한곳에 모아 천천히 분해하여 다른 생명체들의 영양분이 되게도 하고, 그러함으로서 생동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물이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곳에 이미 있던 것들을,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회피하던 것까지도 포용하여 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죠.

 

여기서 첫번째 줄은 혼탁한 상태를 진정시켜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인데, 이를테면 유리잔에 흙탕물을 집어넣고 가만히 놔두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흙탕물 내의 성분들이 밑으로 가라앉으면, 위에는 맑은 물이 나타나게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흙탕물은 Chaos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뒤섞여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죠. 이 Chaos 상황을 진정시키는 과정을 거치면 그 흙탕물에 물이 얼마나 있고 뒤섞여 있던 물질들이 무엇이었는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질서 잡힌 상황이 되게되는거죠. (그러한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은 첫장에 名을 설명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입니다.)

 

이렇듯 질서를 부여하고 나서야 두번째 줄의 내용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가동하여 (安以動), 살아움직이게 하는 거죠. 

 

保此道者, 不欲盈. 보차도자, 불욕영.

 

이런 방식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것이 충족된 상황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무결한 상황이 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설령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결국 다른 문제를 맞이할 경우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夫唯不盈, 故能蔽而新成. 부유불영, 고능폐이신성.

 

완전무결한 상황을 바라지 않으므로, 기존 방식의 오류가 발견되면, 이를 바로 받아들이고, 다시 새로운 방안을 고민하여 만들어낼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15장의 내용은 정리하자면 내가 리더라면, 나의 지식만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함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나의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인정해라, 차라리 세상의 기존 방식과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구해 그로부터 답을 찾아라, 내가 보기에 섣부르고 지저분한 방식들도 결국 우리 삶의 한 실체임을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지만 신중하게 해결책을 고민하라는 말로 보입니다. 다만 이렇게 만들어진 답도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항상 명심해야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끊임없이 개선해야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듯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4장

2020. 4. 17. 14:20 from BoOk/pHiLoSoPhY

視之不見 名曰夷    시지불견 명왈이

聽之不聞 名曰希    청지불문 명왈희

搏之不得 名曰微    박지부득 명왈미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其上不皦 其下不昧    기상불교 기하불매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시위무상지상 무상지상 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能知古始 是謂道紀    능지고시 시위도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현상인지 파악하기조차 힘든 경우죠. 말 그대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상황입니다. (夷, 希, 微라는 단어로 각 상황에 명칭을 다는 것은 뭐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 현상만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고민한다고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현상을 관찰만 한다고 이해가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此三者 不可致詰) 노자는 이러한 상황을 일반적인 논리와 질서가 적용되지않은 혼돈 상황으로 묘사합니다. 뭐 위라서 밝고, 아래라서 어두운 것도 아니며 (其上不皦 其下不昧) 실타래가 꼬이듯 뒤엉켜 있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거죠. 그야말로 無物, 물리적 분석이나 이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그 다음 문장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고, 형상도 이해가 안되어 그냥 흐릿하게 그러한 문제 또는 현상이 있다는 것만을 볼 수 있다는 거죠.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다가오는 것 같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도 그 뒤를 볼 수 없다고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하는 이야기도 결국은 문제의 실마리나 선후 관계를 알 수 없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전대미문의 문제를 마주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될까요? 노자는 기존의 해결책들을 우선 뒤져 당면한 문제에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검토해보라고 합니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익히 알고 있는 예전 해결방식을 사용해서 시작하는 것이 (能知古始) 새로운 문제 해결책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是謂道紀)

 

사실 이 마지막 두문장의 내용은 다소 읽는 사람에 따라 맥빠지는 결론일 수도 있습니다. 막막한 문제를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전에 이미 답 나와있을꺼야, 잘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고민도 안하고 쉽게 말하는 해결책처럼 보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뭐 꼭 그럴까요?)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수천년 전 어느 원시 부족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나섰다고 해봅시다. 뭐 이유야 여러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기존 거주지가 황폐해져서일 수도 있고, 침략자를 피한 것일 수도 있고….. 암튼 익숙했던 보금자리를 그렇게 떠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섰을 사람들에게 지나치거나 잠시라도 머물러야했던 야생의 공간은 그야말로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디서 갑자기 맹수가 튀어나올지 모르겠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될 수도 있었겠죠.

 

아무튼 이동이 불가능하다던지, 더 이상 찾아다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이들은 당시 도착한 장소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야했을 것 입니다. 막막하고 낮설기만한 이 혼돈의 장소에서 이 부족들이 해야될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마을을 재현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나무를 베어내고, 울타리를 만들고, 임시로라도 거처할 숙소를 만들고, 언젠가는 갖추어야할 시설들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하지만 환경이 달라져서 이전과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전에 필요없었던 난방에 대해 고민을 해야될 수도 있고, 습한 지대에 대한 보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시작은 유사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미 적용했었던 해결책을 우선 적용해보고 거기에 맞지않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고민해보는 것이 효율적인 접근법일 수 있습니다.

 

기수립된 방안 중 어느것이라도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紀)를 제공한다면, 그중 가장 나은 방법을 사용하여 우선 대응하고 모자란 부분에 대한 개선을 찾도록 하자는 것이 노자의 제안입니다.   

 

보려하여도 보이지않는 경우를 가르켜 까마득하다 한다 ()

들으려해도 들리지않는 경우를 가르켜 희미하다고 한다 ()

잡으로해도 쥐지못하는 경우를 가르켜 미세하다고 한다 ()

 

사람들은 이런 경우 상황을 세밀하게 이해하기 힘드니 구분이 어려운 혼돈상황이기 때문이다.

위가 밝은 것도 아래가 어두운 것도 아니다.

규정하기 힘들도록 꼬여있으며, 파악이 안되어 이해할 없다.

상태나 형상이 없는 듯하니 이런 상황에 사람들은 그저 당황스럽고 정신이 아득할 뿐이다.

맞이하여도 앞을 없고, 뒤따라도 뒷면을 없다.

 

경우 예전의 방안을 채택하여 지금의 문제를 다스려도록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옛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가 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