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37장

2022. 5. 19. 14:01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통상 어떤 특정 대상을 위주로 하지않아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無爲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않는다라는 더 심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데로 내버려둔다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그런 의미라면 노자는 애시당초 이런 책도 쓰지 말았어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데로 내버려두라고 하려면 이런 글도 쓰는게 아니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변화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오며, 기회의 모습으로도 다가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변화에 대응해야 되며, 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처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에서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대응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전체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해야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단체들만을 위한 방도는 결국 그 집단에게도 해가 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세계의 많은 독제국가나 부폐한 나라들을 보면 특정 계층은 모든 부를 독차지하며 그 기회를 누리는 듯하지만 그 계층 사람들도 경호원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최악의 경우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언제든 최악의 경우로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것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법도 규칙도 관습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최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특정 방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공동체 전체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치지 말아라. 그래야 진정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도덕경 37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왕후들이 이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발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위의 첫 문장은 새로운 방도를 마련함에 있어 지향점 또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즉 전체 이익을 고려하지 어느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태도를 버린다면 그 새로운 방안의 영향을 받게되는 대상들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변화하고 지향하는 바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흔히 결과의 공평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불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의 공평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부당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생각되면 이러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은 조직을, 사회를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들은 이러한 점을 항상 고려하여 일을 추진해야된다고 이야기합니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무언가를 화합하여 만들려할 때, 우리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원소재를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도록) 엄밀히 통제하면서 일을 추진할 것이다.”

 

化라는 단어가 앞 문구에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변화한다는 의미보다는 화합한다는 (또는 조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기존의 또는 현존하는 무언가를 조합하여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作) 있을 테니까요.

 

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띄기 전 원재료 상태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無名이라는 단어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들을 조합하여 또는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새로운 법칙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鎭 즉 진압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 많은 경우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억누르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억눌러야할 대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엄밀히 또는 매우 조심하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큰 대리석 원석을 쪼아내어 조각상을 만들어낼 때 덜어낼 부분과 남길 부분을 매우 조심해서 작업하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식의 해석은 노자의 내용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아직 규정되지 않은 밑바탕 단계라면, 이 또한 어떤 지향하는 또는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에서 가르키는 것처럼 엄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관리 하에 새로운 것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재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통나무는 (樸)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나무 그릇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도끼 자루가 될 수도 있으며, 악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철처한 계획과 숙련된 작업자의 통제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통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업자의 문제인거죠. 통나무는 무엇을 되고싶다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통나무를 탓할 수 없듯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원들의 열망과 역량이 갖춰져 있더라도 잘못된 리더의 생각과 독선에 의해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리한 욕심이 없으면 안정될 것이며, 천하가 장차 자발적으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위의 無欲과 이 문장에서의 不欲은 주어가 다른 대상을 가르키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이 원재료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無欲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不欲은 리더가 무언가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자신을 위한 또는 Inner Circle을 위한 욕심을 가지게되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됩니다. 특히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은 엄밀히 말하자면 위임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활용한다면 분란이 발생될 소지만을 키우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자세를 버리면 靜 즉 조직이, 사회가, 구성원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가게되고 더불어 적절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죠.

 

37장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편견을 가지거나 개인적 욕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과 대신 편견과 아집 그리고 독선을 버리고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면 사회는 계속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