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44장

2024. 2. 21. 13:51 from BoOk/pHiLoSoPhY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명여신숙친 신여화숙다

得與亡孰病

득여망숙병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현상을 정의하는 것과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 중 무엇을 더 가까이 해야겠는가? 실체를 파악하는 것과 이익을 확보하는 것 중 어떤 것에 비중을 더 두어야겠는가?”

 

44장에서 다루는 주요 화두는 名과 身, 그리고 貨 세 가지입니다.

 

名에 대해서는 도덕경 1장에서 다루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名可名 非常名) 名은 지금까지 규정되지 않았던 현상을 증명하는, 즉 정의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F=m*a라는 물리법칙은 이때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힘의 크기를 수식으로 규정한 행위입니다. 즉 “名” 현상을 정의하는 행위라고 보면 되죠. 이러한 "名"의 행위는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던 것을 알아내는 행위죠. 우리가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냈을 때 세상에 없던 수소가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었던 것처럼요. 

 

그러면 身 즉 몸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저는 현상의 본질을 가르키는 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의 名의 행위는 현상을 완벽하게 정의하지는 못합니다.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지향점 등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여 규정하기도 하고, 가용한 자원의 한계로 인해 일부만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현상을 규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의 활동 한계로 인해 이후 보완과 수정의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앞에 언급하였으니 수소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이를테면 수소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아낸 사람들도 수소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있는가를 몰랐을 수 있습니다. 단지 수소의 특징은 이러고 저러고 하다는 정도에 그쳤을 수 있죠. 전자 한개와 양성자 한개로 구성된 수소의 구조를 알아낸 다음에도 그러면 그 양성자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자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두 개의 전자와 양성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하고 변화하는지 처음부터 알고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수소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처음에 수소라는 존재를 알아낸 것이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그 이유로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요? 

 

貨. 위의 이유로 비용에 대한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 즉 이러한 규정을 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즉 한정된 자원을 감안해야되며 또한 어떤 행위가 과연 실익이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세상의 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일까요? 단기적이냐 중장기적이냐의 차이일 뿐 대부분은 사회에 이익이 될 법인 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익이 단순히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더 편한 또는 안전한 환경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지 즉 공리에 기여하는지를 감안하는 것도 모두 이익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名與身孰親, 즉 이 문장은 단순히 둘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추진 중인 행위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본질을 모두 규명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연구가 가장 Ideal 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의 제약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완벽한 본질의 규명은 어렵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身與貨孰多,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활동에 대한 비용을 생각해야되고,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실익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행위도 기대효과 없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위를 왜 열을 내면서 하겠습니까?

 

得與亡孰病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병이 될 것인가”

 

흔히들 과유불급 (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쯤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은 전체적인 면을 생각해야됩니다. 흔히들 말하는 Total Cost 측면을 감안해야 되는거죠. 양쪽의 상충되는 가치에 대해 어느 쪽을 어 두텁게 하고 어느 쪽을 비울지는 한정된 자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리고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더 얻는 것을 추진해야되는가, 아니면 이쯤에서 조금 손실을 보더라도 추진하던 것을 잠간 멈추는 것이 맞는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돌이켜 보고, 이름을 얻기 위해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익을 탐하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상을 찾다가 명분도 이익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된다는 거죠.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이런 이유로 집착에는 큰 비용이 뒤따르고, 쌓아두기만 해서는 추후 이것이 손실이 커질 수 있다.”

 

甚愛 (심한 애착)는 결국 집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집착이 큰 비용으로 연결된다 이야기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다면적인 중간 점검활동이 없이 한편으로 치우친 활동은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이렇던 실익없는 맹목적인 활동을 누적하게 된다면 중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된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조금 망할 것을 크게 망하게 된다는 거죠.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어느 수준이 충분한지를 알면 욕됨이 없을 것이며, 어디서 멈춰야될지를 알면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가히 오래갈 수 있다.”

 

다시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44장은 치우침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론도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활동 및 노력과 투자 그리고 연구의 과정 중 여러 순간마다 과연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괜찮은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