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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29 노자도덕경 26장
  2. 2021.07.19 노자도덕경 25장
  3. 2021.06.21 노자도덕경 24장
  4. 2021.06.04 노자도덕경 23장 2
  5. 2021.03.17 노자도덕경 21장
  6. 2021.01.13 노자도덕경 20장
  7. 2020.11.09 노자도덕경 19장
  8. 2020.11.02 노자도덕경 18장
  9. 2020.10.30 노자도덕경 17장
  10. 2020.10.15 노자도덕경 16장

노자도덕경 26장

2021. 7. 29. 15:27 from BoOk/pHiLoSoPhY

重爲輕根 靜爲躁君

중위경근 정위조군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시이성인종일행 불리치중

雖有榮觀 燕處超然

수유우관 연처초연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輕則失本 躁則失君

경즉실본 조즉실군

 

 

26장의 내용은 이슈를 대하는 리더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을 저는 아래와 같이 풀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가볍게 (輕) 대하여도 리더는 신중하게 (重) 살펴야하니 이래야 조직에 근본이 (根) 선다. 또한 조급하게 (躁) 사람들이 문제를 처리하려 하여도 냉정함을 (靜) 잃지 않아야 다스림이 (君) 이루어질 수 있다.”

 

뭐 길게 설명할 내용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를 접근하고 대응하는 측면에 있어, 신중함과 냉정함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나오는 두번째 문장에서 "輜"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될지 잠시 고민하였습니다. "輜"은 사전에 보면 수레 또는 바퀴살 끝이라고 나옵니다. 수레라고 하면 좀 이야기를 풀기가 어렵겠지만, 바퀴살이라고 해석한다면 11장에 나온 내용과 연관되어 설명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11장에서도 설명하였지만 노자는 지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 이야기하였으며, 그 비유로 비어있는 방과 중간이 살로 연결된 바퀴를 예로 들었었습니다.

 

이렇다면 두번째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인은 종일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 그 바퀴살을 두터이 하려는 원칙을 벋어나지 않았다.”

 

바퀴살을 두터이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수레바퀴의 살들이 부실하여 수레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 가지 못해 바퀴살이 부서져 주져앉고 말 것입니다. 이를테면 리더는 구성원들이 활동함에 문제가 없도록 절차과 제도를 견고히 해야지, 않그러면 (허점이 보이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죠.

 

이어지는 문장에는 "화려한 유혹이 있더라도 이러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雖有榮觀 燕處超然) 그리고 그러해야되는 당연성을 강조하며, "여러 사람을 대변하는 군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일신상의 일을 대하는 것과 같이 천하의 일을 가볍게 다룰 수 있겠냐" 이야기 합니다.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직접적으로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생각하여 개인의 사사로운 명예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첫번째 문장의 내용을 활용하여 신중함과 냉정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섣불리 문제를 가벼히 다루다보면 그 근본을 잃을 수 있으며, 조급하게 임시변통을 남발하다보면 임금의 자리를 잃을 수 있다.” (輕則失本 躁則失君)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5장

2021. 7. 19. 13:42 from BoOk/pHiLoSoPhY

有物混成, 先天地生.
유물혼성, 선천지생.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적혜요혜, 독립불개,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25장의 내용은 천체 물리학을 생각나게 합니다. 많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우주가 수십억년 전 빅뱅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빅뱅 이후 우주는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력과 핵력의 영향으로 한편으로는 원자들이 한곳에 모이는 현상이 발생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별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태양은 지금도 매초마다 10억 x 10억개의 수소가 핵융합을 통해 헬륨을 생성하고 손실된 중력만큼 에너지가 열과 빛의 형태로 발산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이 이야기를 하자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분자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원자는 전자와 양성자 그리고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현재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원자들은 중력과 핵력의 영향으로 이러한 핵융합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져서 형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원소주기율표를 참조)

첫 두 문구는 이러한 과정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先天地生 즉 우주가 나타나기에 앞서부터 有物 무언가 물질이 만들어짐은 混成 복수의 물질이 섞임으로서 이루어 진다는 거죠. 노자가 양자물리학을 알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로 이런 원리를 통해 형성된다면 무언가 새로운 법칙과 해결책을 내는 것도 이런 기본 원리에서 벋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 무언가 하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寂兮寥兮, 獨立不改 적막하고 쓸쓸할 따름이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周行而不殆 같이 가야 위태롭지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러한 원리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죠.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노자는 앞서 이야기 한 것이 천하를 생성한 원리임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무언가 기존에 정해진 규정된 이름은 없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리학 관점에서 지금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명칭이 나와있습니다.)

이어 노자는 字之曰道 하지만 아직 명칭이 없으니 그냥 道(원리)라고 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强爲之名曰大 이 원리는 억지로 설명하자면 커지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 또한 앞서 이야기한 천체물리학을 연상시키지 않나요? 다시 말하지만 우주는 지금 이 순간도 팽창하고 있습니다.)

다음 문구로 넘어가지 전에 사람도 그렇고 상품도 그렇고 나고 소멸하지까지 아래의 패턴을 대부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그리고 대부분의 생명은) 태어나면 일단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게됩니다. 사람이 통상 80~90까지 산다고 봤을 때 성장은 20대가 되기 이전에 대부분 완성됩니다. 상품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전자제품의 예를 들자면 출시 직후 몇 개월이 상품의 성패를 가늠합니다. 이 기간에 전체 Life Cycle의 상당 부분의 물량이 판매되게 되는거죠. 이후 사람도 그렇고 상품도 그렇고 성숙기에 접어듭니다. 성장은 완만하게 낮아지고 사람의 경우 기본 체격에 근육이 더해지거나 지식이 채워지게 되죠. 상품의 경우라면 출시 이후 발견된 문제점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고, 성립된 시장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죠. 사람이라면 노화의 길을 거쳐 사망하게 되고, 상품의 경우라면 판매량이 감소하면서 단종의 길을 것게 됩니다.

이해를 위해 생명체와 상품의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생성 – 성장 – 성숙 – 쇠퇴 Cycle은 국가, 종교, 철학, 유행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라는 세 문구는 표현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무언가 커진다는 것은 밖으로 나아가려는 즉 확장하려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고 (逝) 확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되며 (遠) 이 상황에 다다르면 쇠퇴하거나 반작용이 일어나게 된다는 (反) 이야기를 합니다.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우선 처음에 이야기하였듯 우주의 기본적인 성향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故道大), 하늘과 땅 또한 그 영향을 확장하려하는 성향이 있다 (天大, 地大)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왕 또한 확장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王亦大) 이야기 하고 다시 한번 사람사는 세상도 천지만물과 다르지 않음을, 그중의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여기서 王이라는 대상으로 논의를 한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작성된 글 임을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중간단계의 이야기가 길어져서 처음에 시작하는 내용을 다시 상기해야될 것 같습니다. 천지에 앞서 우주의 논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기존에 있던 것들을 조합하거나 혼합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양자물리학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이야기는 일견 단순합니다. 기존에 있던 것들만을 유지한다면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獨立不改) 이건 인간사회에만 적용되는 논리가 아닙니다. 우주가 그리고 하늘과 땅이 이렇게 생성되었다고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람은 땅에 매여 그 법칙에 순응하고 (人法地), 또한 땅은 하늘 아래 있어 그 풍요함과 황량해짐이 하늘의 법직에 의존하게되고 (地法天), 하늘 또한 우주의 원리를 어긋나지 못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天法道) 그리고 그 우주의 원리는 자연스러움을 따른다고 이야기 합니다. (道法自然).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결국 아래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道 → 大 → 逝 → 遠 → 反

즉 우주의 모든 Solution이나 법칙, 원리 혹은 절차는 수립되어 이를 집행하게되면 점점 견고해지고 모양을 갖춰가게되며 이후 영향을 확대하는 과정이 이루어지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 유효성을 다하게되어 현실과 괴리된 낙후한 모습을 가지게되며, 이후 새로운 것에 그 자리를 넘기고 돌아가게 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죠.

35장의 내용은 결국 같이 해라 혹은 기존의 솔루션으로부터 융합하거나 조합하여 새로운 개선책을 만들어내라, 하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게되어 또 다른 혁신을 이루어야함을 명심하라는 내용으로 해석되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4장

2021. 6. 21. 15:20 from BoOk/pHiLoSoPhY

企者不立 跨者不行

기자불립 과자불행

自見者不明

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

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

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

자긍자불장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기재도야 왈여식췌행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24장의 첫 두 문구는 많은 경우 "발돋움을 하고 있으면 (오래) 서있지 못하며, 보폭을 넓게 걷는 사람은 (오래) 걷지 못한다"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도 다른 이견은 없습니다. 이 두 문구는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단상 위의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려고 까지발을 하고 서있거나, 아니면 마라톤 시작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먼저 치고 나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오래 가지 못하죠.

 

다음 문구들은 나 혼자 나서는 행동이 얼마나 부질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自見者不明 나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은 실상 명철하지 못하며, 自是者不彰 혼자 옳다고 하는 사람은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며, 自伐者無功 혼자 전장에서 싸우려는 사람은 공을 이루지 못하고, 自矜者不長 스스로를 잘낫다 여기는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요약하자면 34장에서 노자는 너 혼자 살겠다고 그리고 너 혼자 돋보이겠다고 하는 행동들은 결국 별볼일 없게 될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其在道也 曰餘食贅行라는 그 다음 말로 이 모든 행위가 결론적으로 대단찮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는데,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런 류의 (基在) 방안 (道)은 먹다 남은 요리 (餘食)와 같아 별 쓸모없는 행위라 (贅行) 한다” 이야기 합니다. 이를 테면 근본적 해결 방안을 내기 위한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그냥 겉치장이나 말단의 내용에 그치게 된다는 이야기죠. 物或惡之 그런 사람이나 행동 (物)들은 타인들에게는 통상 의혹의 대상이 대거나 (惑) 아니면 아예 미움을 받게 되므로 (惡), 방안을 만들어내려는 자는 (有道者) 이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합니다. (不處)

 

조금 더 추가해서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하라는 의미도 될 것 같습니다. 제품이 아무리 예쁘면 뭐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기능이 안되면 소비자에게 외면받게 되는거죠. 알맹이 없이 겉모습만 번드르한 경우 사람들의 이목을 잠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외면당하게 됩니다.   

 

다소 반대 입장에서 저만의 사족을 달자면 위의 내용은 당시 군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큰 그림을 생각해야되는 사람이 국가 백년지대계는 생각하지 않고 나만 인기영합하려고 해서는 큰일 난다는 그런 의미라는 점이죠. 평범한 일반인에게 이런 이론이 적합한지는 의문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고, 튀지 않으려 가만 있으면 누가 나의 능력을 알아서 써주겠습니까? CF에서 “말 하지 않아도 알아요”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정말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그냥 사족으로 이야기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3장

2021. 6. 4. 14:06 from BoOk/pHiLoSoPhY

希言自然
희언자연
故飄風不終朝
고표풍불종조
驟雨不終日
취우부종일
孰爲此者 天地
숙위차자 천지
天地不能久
전지상불능구
而況於人乎
이황어인호
故從事於道者
고종사어도자
道者同於道
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
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
실자동어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동어도자 도역락득지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동어덕자 덕역락득지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동어실자 실역락득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인언
 
33장의 내용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일을 도모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처음부터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希言自然이라는 문구는 이런저런 해석들이 있으나, 저는 “말을 아낌이 자연스럽다”로 해석하였습니다. 때로 리더가 말을 아끼면 (간섭이 없으면) 일은 저절로 돌아간다던지 하는 해석이 있던데,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많은 경우 갈팡질팡하게 되거나 내팽겨져 아무 진전이 없는 경우가 발생되게 되죠. 따라서 希言自然이라는 이야기는 독단을 부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두를 꺼낸 것이지, 아무 관여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뒤의 두 문구는 리더가 아무리 잘나더라도 혼자 일을 독려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故飄風不終朝  표풍도 아침 내내 불지는 못하며, 驟雨不終日 소나기도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다. 孰爲此者 天地 이렇게 하는게 누구인가? 거룩한 하늘과 땅이다. 天地不能久 이 대단한 하늘과 땅도 길게 못하는 것을 而況於人乎 사람이 어쩌 하겠는가?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회오리 바람과 소나기를 비유로 들었다는 점입니다. 바람에도 여러 바람이 있으며, 비가 오는 방식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회오리와 소나기는 그중 어쩌면 극단적인 경우를 가르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마치 리더가 구성원들을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상황을 비유한 것 처럼요. 그리고 노자는 이런 다그침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 것 같습니다. (뭐 태풍은 오래 불긴 합니다.) 希言에서의 言은 아래사람을 닥달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을 적게해야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앞에서도 많이 이야기하였으나, 노자는 리더 혼자의 독단에 치우치지 말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한들 천지에 비할 것이며, 천지도 못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죠. (천지의 비유를 뒤에 들 것을 염두에 두고 첫 문장에 自然이라는 단어를 사용된 듯도 합니다.)
 
그럼 리더는 대안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될까요?
 
故從事於道者 즉, 道者에 따라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그럼 道者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道者同於道, 즉 같은 道를 가진 사람들 혹은 같은 道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道者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道는 방안이나 Solution이라고 한다면, 德은 가치관이 투영된, 즉 선택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이 장에서 새로이 나오는 失이라는 단어는 德에 대치되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덜어내야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저는 해석하였습니다.
 
즉, 뒤의 두 문구 중 德者同於德는 어떤 가치가 더 나은 것인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가르키며, 失者同於失은 덜어내야할 것이 어떤 것인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집단을 만들어 공통적으로 적용될 제도를 만들고, 프로세스를 개선하며, 일을 추진하는 것은 같은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통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최고경영자로부터 현장 노동자까지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토론과 회의 그리고 조사를 통해 회사의 주요 추진과제를 선정하며 그 목표를 다하기 위해 매진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수립된 방향으로 일을 하면 회사나 구성원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렇게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어야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수립된 방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며,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추진하는 방향성을 기쁘게 받아들으며,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혹여 희생하거나 줄여야되는 부분도 이견없이 추진하게 됩니다. 뜻을 달리하는 경우, 아무리 강압적으로 행동을 강요한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 대비해 일의 효율은 떨어지게 되며, 성과 또한 낮게 될 것입니다.
 
信不足焉 有不信焉 대치되는 이 마지막 문구는 언뜻 말장난처럼 느껴지지만,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성원 간에 리더와 실행 인원들 간에 신뢰가 부족하면, 앞으로 해야되는 일들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일게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면 더 이상 이들은 같은 목적을 가진 집단이 아니게 됩니다. 같은 철학과 목적과 지향점을 가지지 않고되는 거죠.
 
33장에서 노자는 첫머리에 말을 아끼라 조언합니다. 나만 떠드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거죠. 대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찾던지 아니면 사람들과 협의를 통해 같은 뜻을 가지도록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전제가 되어야 일이 무릇 이루어질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1장

2021. 3. 17. 18:14 from BoOk/pHiLoSoPhY

孔德之容, 惟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활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中甚眞, 其中有信.
기중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자고급금, 기명부거, 이열중보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오아이지중보지위재, 이차
 
 
21장의 첫 글자는 孔입니다. 孔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로 쓰여진 걸까요? 사전을 찾아보면 구멍이라는 뜻으로 가장 먼저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뜻도 몇몇 있는데 크다던가, 헛되다, 통한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孔이라는 단어를 11장의 無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孔德之容이라는 첫 네 글자는 “비어있음의 덕은 받아들임 (수용함) 에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네 글자로 더욱 비움의 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惟道是從 “오로지 도는 이를 따른다”라는 것이죠. 첫 단원은 결국 비움의 미덕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이며, 왠만한 Solution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道는 다시 이야기 하지만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는 곳에 형성되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大道無門이라는 말은 큰길에는 일종의 검열 역할을 하는 Gateway 즉 門이 없다는 의미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나의 의지를 투영하려고 고집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수용할 수 있는 빈공간 또는 Play Ground를 만들어주면 그 다음 자연이 해결책과 새로운 Idea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道之爲物, 즉 구체화된 뭔가를 (物) 만들어내는 (爲) 길(道)이 되는 것이죠. 
 
다음 세문장에 恍과 惚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쓰여집니다. 황홀하다라고 해석될 수 도 있는 이 두 글자는 이 경우 앞서 14장의 夷, 希, 微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상황이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말이죠.
 
전체적인 현상만으로 방안을 수립하려 하는 상황는 막연하고 막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차분이 수용하다보면 대상을 명확화할 수 있고 (象), 모호했던 것이 구체화되고 (物), 일을 추진하는 동력을 형성하게 되며 (精), 깊이 진실된 마음들을 모을 수 있고 (眞), 구성원들의 믿음도 확보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信)
 
이 모든 절차의 기본은 孔, 즉 나의 Bias가 반영되지 않은, 그것을 비운 수용하는 자세에 있다고 본 것이죠.
 
마지막 두 문구는 수용하는 자세가 오래토록 검증된 道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로 보았습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즉,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不去) 정의 (名)라는 것은 덧붙여 설명하자면 오래살아남은 절차나 제도, 문화는 일반 대중들의 (衆甫) 교열 (閱), 즉 집단지성의 검증을 거친 대상들이라는 것이죠.
 
오래 살아남은 이름이나 방식, 습관, 문화는 결국 한 위대한 위인의 갑작스런 발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그 구성원들의 반복된 정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라는 마지막 말은 이를 강조해 표현한 것으로 “내가 어찌 사람들의 상태를 알겠는가, 이로써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그 대중의 문화나 습관은 그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문화나 관습을 보면 그 구성원들이 거쳐온 역사와 환경, 그리고 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0장

2021. 1. 13. 13:42 from BoOk/pHiLoSoPhY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선지여악, 상거하약. 인지소외, 불가불외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형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기미조,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여상아지미해. 내래혜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요혜사무소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도덕경 20장은 絶學無憂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배움을 끊으면 근심할 바가 없다라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또는 공부 해봐야 근심거리만 되므로 그냥 속 편하게 살도록 배움을 멈추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노자의 철학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絶學無憂라는 말은 배움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되며, 눈 앞에 재앙이 다가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뒤의 문장을 보면 이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唯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공손히 대답하는 말”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阿라는 단어는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唯之與阿, 相去幾何라는 말은 공손하게 또는 친근하게 상대방에게 이야기 하는 것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가, 즉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한거죠.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칠 것이고, 결국 이 배움을 바탕으로 어른들에게는 존대를 하게 됩니다. 배우지 못한 아이 때는 주변 사람들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더라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남발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이 문장의 더 가까운 뜻은 어느 경우에 또는 어느 대상에게 공손해야 되며, 어느 사람이나 경우에 상대방에 친밀하게 대하여도 되는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라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결국 배움이 중요한 거죠. 배움이 부족하면 경계에 대한 구분도 합리적이지 못할 수 있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善之與惡, 相去何若라는 말도 선과 악이 때로는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경계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악에 발을 담그게 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人之所畏, 不可不畏라는 글에서 之라는 단어는 有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대상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직역되는데, 이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 심각성을 인지 못하면 아무리 큰 재앙이 코 앞에 닥쳐도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문구입니다.

 

다음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荒兮其未央哉, 거칠고 어두운 재앙이 아직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닥치지 않은 상황에서는)

衆人熙熙 사람들은 희희낙낙합니다.

如亨太牢 그냥 고기 굽고,

如春登臺 봄날 전망대에 올라 즐기 듯 말이죠.

我獨泊兮其未兆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견하는 나는 (노자는) 홀로 아직 닥치지 않은 이 징조를 초조한 마음으로 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어지는 如嬰兒之未孩라는 말은 아직 어린아이도 못된 간난아기로 해석하였습니다. 뒤이은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게으르고 게으르니 사람들이 여유가 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은 향하는 바가 없다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목적이 없다라는 뜻으로도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겠고요. 바라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없이 지내게 되면 결국 그 나태함의 대가가 후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그 시간에서의 안락함에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이 두 문구는 마치 굴원의 ‘어부사’를 생각나게 하는 문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입으로 닥쳐오는 위기를 무시하면, 이를 알고 있는 나는 홀로 버려져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게된다는 말로 해석하였습니다.

 

나머지 문구는 노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에 문장별로 해석하려 합니다.

 

沌沌兮, 나는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지는데

俗人昭昭, 사람들은 모두 총명한 것처럼 굴며 나를 대하고

我獨昏昏, 나는 어찌 이 위기를 헤쳐나갈지 혼란스러운데

俗人察察, 사람들은 통찰력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대수롭치 않게 여기며,

我獨悶悶, 나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데

澹兮其若海, 飂兮似無所止, 衆人皆有以,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이를 보아 바다와 같이 담담하고 바람소리와 같이 거칠 것이 없게 보인다.

而我獨頑且鄙, 오직 나만이 고집불통이어서 쓰일 곳 없이 되었으니,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귀히 여겨서다.

 

거의 대부분 우리 속담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마지막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는 말은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위기에 대해 내가 근심하는 것은 결국 나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안위와도 연결이 되어서, 그리고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모를 대표적으로 표연하여 타인의 안위가 이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지않을가 하는 것이 자신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들기위한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20장의 이야기는 배움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움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위기에 대한 인식 능력은 결국 배움에서 비롯되며, 걱정없이 되는데로 살다보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하게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 하는 것이 20장에서 노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9장

2020. 11. 9. 11:07 from BoOk/pHiLoSoPhY

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성기지 민리백배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차삼자이위문불족 고령유소속

見素抱樸 少私寡欲

견소포박 소사과욕

 

노자도덕경 19장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 뭔가 규율이나 강제할 수 있는 논리들을 (聖, 智, 仁, 義 등) 없애면 민중들이 알아서 잘하게 된다라는 식의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하기만 그런 논리라면 앞장에서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던 孝慈라는 문구가 여기서는 왜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는지 앞뒤가 않맞는 느낌을 받게됩니다.

 

저는 19장의 첫 3문구는 뒤의 내용을 지향점으로 해서 앞의 행동을 진행하라는 식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앞장에서 잔가지가 아닌, 근본적 개선에 대한 강조를 하였다면 그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한다라는 구조로 말이죠. 이 경우 첫 세 문구는 아래와 같이 해석됩니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성기지 민리백배)

백성들의 이익을 백배로 늘릴수 있는 방향이 되도록 기존에 떠받들던 성스러운 것을 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지혜를 버려야 한다.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사람들이 효와 자애로움을 다시 되찾도록 기존에 어질다고 생각했던 행위와 의로움의 기준을 폐기하고 근본부터 다시 수립해야한다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나라에 도적들이 없어지도록 교묘하고 이익이 나올 여지를 찾아 없애야 한다.

 

絶聖으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어찌보면 맹자의 역성혁명의 근거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스러운 것들, 그리고 떠 받드는 지식들의 존재의 근거는 그리고 그 시작은 백성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자는 것이었다지만 시간이 지나며 주객이 전도되어 왕조나 종교가 그리고 이론이 主가되는 경우가 인류 역사에는 허다합니다. 노자 19장은 지금의 질서가 결국 그 근본에 배치되는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잘라내야된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성서럽게 받들던 왕조일지라도, 지혜로운 것으로 떠받들어지던 철학이나 종교일지라도, 어진 것으로 의로운 것으로 떠받들여지던 관습들도 이러한 체계와 절차와 이론들이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되어 그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나라의, 사회의 도적들이 법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그 허점을 찾아서 보완해야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이상에만 치우치지 말고 현실적인 실무적인 부분도 치밀하게 살펴야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행위는 책상에 앉아 문구나 서류로서만 집행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此三者以爲文不足) 마땅히 소속된 사람들에 대해 직접 그 명령을 수행해야된다고 말합니다. (故令有所屬)

 

그리고 이러한 개혁활동은 소박한 사람들을 찾아 그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見素抱樸), 또한 나의 개인적 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少私寡欲)

 

 

개혁의 진행방향은 우리가 성스럽게 떠받들던 것들과 지혜로서 우러러보던 것들이 사람들의 이익에 기여하는지 살펴봐서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과감히 이를 떠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仁과 義의 도덕적 관념이나 관습들도 더 이상 변화된 세상에 기능을 못하는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면 이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사람들이 효와 자애로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을 찾아봐야 한다.

기존의 절차나 체계들을 더 정교히 하고 인센티브를 부여하여도 이는 부질없는 일이 될 뿐이라면 말단을 개선하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 이에 빌붙어 세상을 좀 먹는 도적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행동은 책상머리에 앉아 문서로만 공포해서는 아무리 좋은 내용도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 소속된 집단에 직접 참여하여 새로운 령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개선활동의 또한 근본 목적은 사회의 소박한 일반대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의 개인적인, 일부 특권층의 욕심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8장

2020. 11. 2. 10:46 from BoOk/pHiLoSoPhY

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

대도폐 유인의 지혜출 유대위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육친불화 유효자 국가혼란 유충신

 

노자도덕경 18장에 대해서 많은 경우 이상적인 세상에서의 큰 가 없어지고 나니,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큰 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인의 같은 것들이 강조되었다는 식의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내용도 조금 다르게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존의 사회체계가 송두리째 바뀌게되는 일이 발생되곤 합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으로 수백년간 굳건하게 자리잡았던 전제 군주정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들어서게 됩니다. 공화정이 그렇다고 한 순간에 프랑스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간의 물리적, 이론적 공방이 이어졌었고, 때로는 군주정으로 역행하는 시기들을 거치고야 공화정 체계가 확립되게 됩니다.

 

여기서 大道廢라는 말은 그래서 가장 상위의 큰도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 (이렇게 해석하면 1장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는 없다라는 말과도 배치된다는 것도 감안해야됩니다..) 기존의 큰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개혁과 혁신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이나 용도폐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 닥쳐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겠고, 선견지명이 있는 경우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방안을 수립하는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리고 그런 의문이 있은 이후에 무엇이 옳은 것 (仁義)이고 어떤 것이 더 현명한 방안(智慧)이며, 지금까지 당연한 듯 행했던 일들 중이 어떤 것이 잘못된 것(大僞)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게 되면, 예를 들어 육친이 (부모, 형제, 자녀) 불화하게 되면 누가 그제서야 효자였었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는지를 알게되며, 국가가 위기에 처해서야 진짜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하였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종합하자면 노자도덕경 18장은 무언가를 개선하려면 말단에 머물기보다 근본적 부분까지 개선을 고민해라, 그래야 무엇이 남길 부분이고, 무엇이 근본 이슈였는지 알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그냥저냥 좋은게 좋다고 덮고 지나가다 보면 누가 정말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는지, 누가 정말 나를 생각하는 자식이었는지, 그동안 나의 눈을 가리고 임기응변과 감언이설로 조직에 암적인 역할을 하던 사람과 절차를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는 거죠.

 

흔히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18장에 가장 적합한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전까지 의문을 품지않고 적용되었던 Rule이 그 수명을 다하게되면,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마땅하고 옳은 방안이 드러나게 된다. 새로운 지혜가 나오게 되며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었는지도 드러나게 된다. 마치 가족간에 불화가 생기고서야 가족 중 누가 효자이고 어진 어른이었는지를 알게되는 것이며, 나라가 혼란에 닥쳐서야 충성스러운 신하가 누구였는지를 알게되는 것과 같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7장

2020. 10. 30. 11:29 from BoOk/pHiLoSoPhY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태상 하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유혜 기귀언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많은 책에서 노자도덕경 17장을 지도자와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뭐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등으로 말이죠.

 

하지만 비록 노자가 쓰여진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있는지 정도만 사람들이 아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직생활을 경험한 분들이라면 이런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세상 만사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통한 생존과 발전을 위해 리더는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같이 고민하는 자리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16장의 연장선상에서 17장은 Rule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들은 1년이 365일이고, 하루는 24시간이며, 지구는 태양 주변을 1년 주기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감기에 걸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않은 바이러스 때문이고, 강한 햇볕 아래 오랫동안 있으면 자외선으로 인해 피부가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되는 것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0의 개념을 대부분 알고 있고, 자신의 키를 cm 단위로, 몸무게는 kg 단위로 알고있거나 이따금씩 살펴보죠.

 

“太上 下知有之”라는 말은 이러한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공인되어 당분간은 논란이 없고 변할 듯 싶지 않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게되는 그런 법칙말이죠.

 

사람들은 문제에 봉착하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대응책들은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내놓은 대응책은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노자 17장의 내용은 가장 높은 것이 그것이 법칙이었다는 것조차도 인식 못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며 (굳이 또 예를 들자면 빨간불에서는 신호등을 건너지 말자는 것 같은?), 그 다음은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진 법칙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열광하는 것이며 (親而譽之), 세번째 순위는 사람들이 그 법칙을 어길 경우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畏), 그 다음은 그런 법칙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하는 것, 심지어는 경멸하는(侮) 것이 된다고 보는 거죠.

 

국가나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규칙이나 Rule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합리함을 느끼는데도 그러한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받게될 징계나 질책이 두려워 따르는 경우도 있고요.

 

“信不足焉 有不信焉”이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적용하고 있는 Rule에서 개선의 대상이 어느 것이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아닐까 합니다. 조직에 적용되고 있는 어떤 Rule이 있는데 그로 수반되는 문제도 많고, 의구심이 생기게 되면 (信不足), 이 Rule에 대해서는 심할 경우 사람들이 신뢰를 하지않게되는 것이고 (有不信), 이것이 개선되어야할 법칙이 되는 것이죠.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라는 문구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조급하지 않게 (悠兮) 진행하며, 신중히 그 의견을 개진하여 (其貴言),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지향점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수준까지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百姓皆謂我自然)

 

노자의 1장을 생각하면 모든 법칙이 영원할 수 없다라고 전제하였지만, 어차피 바꿀거 대충 Rule을 만들거나 적당히 하자라는 의미가 아님을 17장에서 말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좋은 완결성을 갖춘 법칙을 지향하여 고민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그 이후에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모든 기존의 성과에 대해서도 더 개선할 점이 없는지를 생각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노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로 생각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6장

2020. 10. 15. 10:38 from BoOk/pHiLoSoPhY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앞장에 본 바와 같이 虛라는 말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빈 공간을 말하기 보다, 최소한의 약속된 Rule이 적용된 활동 무대라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靜이라는 말은 이러한 무대를 제공한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무대가 크면 클수록 (虛極) 더 많은 의견과 생각이 도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제공한 사람은 가능한 (절대가 아니고) 그 무대를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한다면 (靜篤), 그 무대에서 만물이 다시 말하면 다양한 성과가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얻어질 것이라는 말이죠.

 

조금 더 부언하자면 저는 靜이란 말이 그냥 방치하고 입을 다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섭은 최소화하되, 필요한 경우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한다는 의미를 복합적으로 담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흙탕물을 빈(虛) 유리병에 넣은 후 흔들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靜) 시간이 지나 부유물은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위로 뜨게됩니다. 아무튼 그 유리병에 물을 담고, 흙탕물이 안정화되도록 인내를 발휘하는 것은 노력이 수반되는 행위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아니죠.)

 

이러한 노력 끝에 그 혼돈스럽던 상황이 정리되고 무언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얻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이 정립하게 되는 다른 문제해결의 바탕(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고민하여 더하기나 빼기, 나누기와 곱하기 같은 수학공식을 만들어낸다면 이런 이론이 더 발전된 수학 이론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게된다는거죠. 이러한 과정을 도덕경에서는 復이라는 단어로 압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선순환과 같은 의미로요. 눈으로 보이는 현상은 혼란스럽고 다양하지만 (夫物芸芸),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질서가 잡히고 또 다른 질서 수립을 위한 바탕이 되게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첫번째 문구는 이미 이야기한 내용의 반복이 될 것 같습니다. (歸根曰靜)

그런데 다음 두 문구가 다소 재미있습니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靜이라한다, 이를 일컬어 復命이라하며, 復命을 常이라 한다”

 

復命의 사전적 의미는 업무를 마치고 그 위의 사람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常에 대해서는 이리 첫장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첫장에서 常이라는 것은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구불변한 진리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므로 이번 내용에서의 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존의 것을 대치하던 아니면 새롭게 수립된 기준이나 법칙, 이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혼돈된 상황을 정리하여 (靜), 이를 정리하여 구성원이나 리더의 합의를 이루는 단계를 거치면 (復命) 이후 이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죠. (常)

 

그리고 이러한 기준을 체득화하여 알게되는 것을 (知)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明) 이미 수립된 아니면 알려진 기본적 내용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일을 망치게 된다고 노자는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이번 단원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사람들(公)에게, 그리고 王에게, 그리고 천하에 받아들여지면 (容) 이것이 새로운 질서인 道가 되는 것이고, 새로운 질서가 안정적이고 오래토록 유지된다면 종신토록 (아마 제후를 가르키는 듯한데) 나라에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도 보고, 조금 다르게 해석하자면 常을 알게된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고, 이러한 질서가 공공에서 영구한 질서로 더욱 발전하게 되면 그 이론 자체가 그 단계에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는 첫번째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