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pHiLoSoPhY'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8.12.21 노자도덕경 5장
  2. 2018.12.07 노자도덕경 4장
  3. 2018.11.30 노자도덕경 3장 2
  4. 2018.11.22 노자도덕경 2장
  5. 2018.11.11 노자도덕경 1장
  6. 2007.10.02 기독교 성서의 이해

노자도덕경 5장

2018. 12. 21. 14:01 from BoOk/pHiLoSoPhY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天地之間 其猶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수궁 불여수중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여기까지 내용을 보면 노자에서 聖人이 논어의 그것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논어에서의 聖人이 초월적 위치의 哲人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면, 노자에서의 聖人은 당시 이 글을 읽어줄 것으로 기대되는 독자층, 즉 자신의 철학을 구현시켜주기를 바라는 대상인 군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위의 두 문구는 천지가 이러하므로 성인은 마땅히 이러해야한다는 댓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풀어 해석하였습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긴다, 성인도 인자해서는 안된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겨야한다."

 

현재의 민주공화정 시민들에게 이런 내용은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풀강아지로 여긴다는 것은 백성을 하찮게 여기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상대에 대해 주관적인 감정이나 호오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생각해야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서 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도자가 너그러워지려는 마음을 가지더라도 이는 어느 특정 대상이나 계층에 한정되기 십상이며, 이 경우 그 혜택에서 소외되는 집단이 생기게 되어 필연적으로 집단 내에 갈등을 유발할 여지를 만들게 됩니다.

 

노자는 하늘이 만물에 대해 풀강아지 대하듯 통치의 대상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이 착한사람에게만 더 좋은 날씨를 주고, 나쁜 사람들만 골라 천재지변을 일으키지는 않으니까요.

 

무신론자라서가 아니라 구약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보살피지? 왜 유대인들처럼 이교도들 앞에 나타나서 내가 신이라고 얘기하고 소위 성경에서 얘기하는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 거지?  왜 그때는 그렇게 부지런하게 사람들 앞에 출현하시다가 요즘에는 전혀 무심한 듯 모든 일에 관여하지 않는 거지 등등...

 

물론 노자에서 말하는 천지가 어떤 절대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무신론자인 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만들어내었어도 그 이후 불편부당하듯 지도자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하자면 소위 리더는 밑의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내가 착해야지, 저사람들에게 잘보여야지 라는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이로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어떤 주관적인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현실을 보며 가능한 편중됨이 없어야한다는 의미를 담은 두 문장으로 이해됩니다.

 

地之間 其猶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여기서 다시 천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해석을 아래와 같이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빈 공간은 마치 그 (풀무)와 같다. 빈틈이 있음에 굴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앞서 잘못한 점을 고쳐낸다"

 

앞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도덕경에서는 사전에 준비한 해법이 항상 완전무결할 수는 없으며, 지금 당장 확실하지 않다면 앞으로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일단 시작할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여 개선해나가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합니다. 준비한 해법이 완전무결하지 않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개선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수궁 불여수중 

 

여기 이 문구는 많은 경우 "말이 많으면 수가 궁해진다"는 식으로 해석들이 됩니다. 이것도 좋은 말이기는 한데 뭔가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여기 多言數窮이라는 문구는 의견을 많이 나누고 (말을 많이 하고) 수를 궁리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만의 생각을 고집하는 경우라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지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단, 이 경우도 "不如守中" 즉 자신만의 중심은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주관을 지켜야된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풀어서 전체를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긴다, 성인도 인자해서는 안된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겨야한다. 하늘과 땅 사이 빈 공간은 마치 그 (풀무)와 같다. 허점이 있음에 비굴해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앞서 잘못한 점을 고쳐낸다. 의견을 많이 나누고 방도를 찾을 것이되,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4장

2018. 12. 7. 13:18 from BoOk/pHiLoSoPhY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충, 이용지, 혹부영

淵兮似萬物之宗.

연혜사만물지종

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湛兮似常存.

담혜사상존

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갈 수록 내용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다른 내용도 모호하고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될지 어려웠는데, 특히 여기서 가장 이해가 안되었던 문구는 象帝之先이었습니다. (정말 무슨 말이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튼 한줄한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충, 이용지, 혹부영


여기서 沖字는 사전을 보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화하다, 겸허하다, 담백하다, 비다, 공허하다 등등) 어떤 내용이 가장 적합할까 생각을 했었는데, 세번째 문장의 내용을 감안하면 겸허하다는 내용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독선적으로 고집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도 그렇고요. 아무튼 아래와 같이 풀었습니다.

"일을 풀어가는 방식인 도를 집행할 때는 겸허해야된다.
 완전 무결하게 채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둬야된다."

대상을 규정하고 문제를 파악한 다음에 솔루션을 내고 이에 따라 개선을 하거나 관리를 하는데, 내놓은 솔루션을 집행함에 있어서 가져야하는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 사용되었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 철두철미하게 빈틈없이 함은 중요하죠. 하지만 다른 방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는 둬야된다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아래에도 계속 얘기는 이어집니다.

淵兮似萬物之宗.

연혜사만물지종


위의 문구를 풀면 "연못이로구나, 만물의 근원과 같다." 해석이 됩니다. 여기서 字가 뒤의 字와 댓구가 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연못은 많은 자연의 것들을 담고있고 온갓 수초와 벌레, 물고기 등 그에 의지하는 것들에 삶의 터전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투명하고 맑고 깨끗하지는 않죠. 때로는 물냄새도 나고, 진창이 있기도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道라는 것도 이러하다는 점을 비유로 들어 연못의 이미지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금 선택한 道가 완전무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점진적인 개선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선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비유로 설명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아니면 하나의 방안만을 가지고 일을 행할 것이 아니라, 여하한 경우에 대비한 Plan B도 준비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고요. 세상사는 기대하고 생각한 데로만 진행되지는 않는 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좀 더 자세히 예를 들어서 앞에 내용을 보완하는 문구입니다. 


"도를 집행함에 있어 너무 예리한 면은 누그러뜨려야 어지럽게 꼬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며,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조절하여야 더러움을 하나로 모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湛兮似常存.

담혜사상존

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이 마지막 두 문구가 무슨 의미일지 고민이 되었는데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댓구를 이루는 구절로 이해하여 풀었습니다. 은 "맑을 "字 입니다. 아래와 같이 풀었습니다. 연못이 만물을 담아 탁하다면, 이에 반하여 절대적인 선이나 기준이 있어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불변의 법칙을 가르키기 위해 사용한 비유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象帝는 뭐 다른 번역서에는 고대의 제왕부터 시작해서 하느님 등등으로 해석한 것들이 눈에 띄는데 그래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왠 갑자기 고대의 제왕이나 창조주가 여기서 나올까요? 저는 象은 만물이고, 帝는 나라를 가르키는 것으로 따로 떨어뜨려서 푸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물이 생기고 사람들의 나라가 생기기 앞어서..."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상기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두 문구를 아래와 같이 풀었습니다. 


"만물과 나라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순수하고 영구불변한 도와 그를 행한 자를 나는 아는 바 없다."


전체를 모아 아래와 같이 4장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일을 풀어가는 도를 집행할 때는 겸허해야된다. 완전 무결하게 채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택의 여지를 고려해야된다. 도는 만물이 담겨있는 연못과 같아 깨끗하고 더러운 상황을 모두 감안해야한다. 도를 집행함에 있어 너무 예리한 면은 누그러뜨려야 어지럽게 꼬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며,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조절하여야 더러움을 하나로 모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물과 나라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순수하고 영구불변한 道와 그리 행했다는 자를 나는 아는 바 없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장

2018. 11. 30. 09:35 from BoOk/pHiLoSoPhY

不尙賢,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부위도
不見可欲,使民心不亂。                                     

부견가욕, 사민심부란
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 強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使夫智者不敢為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為無為,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도덕경 3장은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우민정책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虛其心이나 弱其志 같은 문구는 (특히 弱其志) 대중들은 멍청하게 만들어 배나 불려주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맞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의미가 그렇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장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윗사람들이 가져야되는 자세를 우선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라 라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내용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죠.


不尙賢,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부위도
不見可欲,使民心不亂。                               

부견가욕, 사민심부란


이 세문장은 간단히 얘기하자면 기본에 충실할 것이지 과시를 위한 것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고고하며 난해한 성현의 말씀을 찾아 숭상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분쟁부터 없도록 할 것이며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도적질부터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하고 싶었던 것, 이룩하고 싶었던 것들을 찾아다니기에 앞서, 민심이 혼란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독단적으로 사람들의 뜻에 역행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여서 민심을 어지럽히지 말아라.)




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 強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위의 내용이 앞에서 지도자가 삼가해야할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아니면 어떤 것을 배풀어야할지에 대해 말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던 점을 감안하고 이 문장을 해석해야 할 듯 합니다. 


이러한 사유로 성인의 통치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사람들의 살림을 풍족하게 하는데 있어야 하며, 자신의 뜻만을 관철시키려 하지 말고 근본적 체계를 튼튼히 하는데 있어야 한다


사실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않습니다. 지도자가 어떤 철학이나 방향성이 없이 어떻게 집단을 강하게 만들 수 있겠냐는거죠. 하지만 앞장에서 대체적인 사회구성원의 합의가 이루어진 방향으로 일을 해야된다는 점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면,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제가 되어 반복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회구성원의 생각과 동떨어진 리더 자신만의 마음이나 뜻을 고집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常使民無知無欲,使夫智者不敢為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為無為,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3장을 마무리하는 두 문장입니다. (뒤에 수시로 언급되는 無爲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내용 바로 해석하자면,


지도자는 사람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지식이나 욕구를 미리 가져서는 안된다. 

그래야 중간에 소위 무언가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감히 일을 함부로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를 추구함에 있어 미리 독단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앞의 내용들을 보더라도 無爲는 단순히 마음을 비우고 세상 가는데로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해석들 때문에 노자를 읽다보면 무슨 허무의 철학을 읽는 듯한 상황이 종종 되고는 하죠.) 단지 억지부리지 말아라, 너가 생각하는 것이 꼭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라. 선입견 가지지 말고 지금 시점에서 보았을 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중의를 모아서 합의 하에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전체 내용을 모아 아래와 같이 다시 정리합니다. 


"고고하며 난해한 성현의 말씀을 찾아 숭상하기에 앞서, 사람들 간의 분쟁부터 없도록 할 것이며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도적질부터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앞뒤 생각없이 바라던 것만을 찾아다녀 사람들 간의 논란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의 통치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보다 사람들의 살림을 풍족하게 하는데 있어야 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보다 사회의 근본적 체계를 튼튼히 하는 방향을 고민하여 이룩하는데 있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지식이나 욕구를 미리 가져서는 안된다. 

 그래야 중간에 소위 무언가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일을 함부로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를 추구함에 있어 미리 독단적인 자신만의 의도를 가지고 그를 강요하는 일이 없다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장

2018. 11. 22. 17:21 from BoOk/pHiLoSoPhY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첫장에서 道와 名에 대해 우선 화두를 던지고 名에 대해 주로 이야기 하였다면, 두번째 장은 名을 부여하는 의미와 道에 대해 운을 때는 듯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첫 두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이 두 문장은 얼핏 보았을 때는 爲美와 爲善이라는 문구가 있어 꾸미고 위선을 행하는 것이 추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아래의 내용과도 흐름이 어색하고 첫장의 내용과도 갑자기 방향이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죠. 오히려 이 두 문장은 사람들이 대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또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추하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선하게 하려한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의 문구들이 전반적으로 대립되는 명제가 사실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의미의 설명으로 연결되는 것도 그렇고 성인이 무언가를 행하고 이루어낸다는 말을 감안하여도 아무것도 하지말아라라는 설명은 좀 앞뒤가 않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앞에 장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첫단계 성격이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개념을 정하고 나면 상대되는 추하다는 개념도 성립될 것이고 착하다는 개념이 성립되면 반대되는 선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규정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사람들이 개선의 대상을 명확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후 어떤 방식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게되는 것이죠. 


풀어서 이 두 문구를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려한다

또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만들려 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글자는 "皆"자 입니다. 노자는 절대선이나 절대미, 이를테면 이데아적인 대상을 규정하고 사람들이 이를 추구해야된다는 당위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전반적으로 알려진 규정이나 관습에 따라 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는 현상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추한 것이 있으면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꾸미려 하고, 모두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하게 고치려 한다는 거죠.


영구불변의 선이나 미의 기준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발전이 없습니다. 오늘 이 방향으로 개선을 하고 내일 다시 고민하여 다른 방식으로 추가 혹은 근본적인 개선을 꾀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은 어떤 특정 엘리트 집단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구성원의 전반적인 합의와 공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노자는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우선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앞에 문장에 이어서 대립되는 대상들을 몇몇 열거하여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有와 無가 서로 상생하는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고, 어려움과 쉬움이 상호 보완관계에서 성립되고, 길고 짧음이 있어 비교를 할 수 있으며, 높고 낮음이 있어 경사가 이루어지며, 음악과 목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가 있어 순서를 정해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길게 얘기할 내용은 저로서는 없네요.)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의 두 문장은 聖人 즉 본보기로 삼아야할 사람들이 어떻게 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문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머무를 處'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되는지가 다소 어려움이 있는데요, 앞의 내용등을 감안하면 상식적인,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자리를 둔다, 선택한다 정도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이에 자기 주장을 억지로 고집하지 않으며, 남들을 가르킴에 있어서도 장황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교화한다."


다소 모순적일 수 있는 것은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될 만한 聖人을 노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방법일 수도 있고, 또한 관습적으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였을 수도 있지만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상대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노자에서 절대 기준의 대표적 이미지인 聖人을 사용한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聖人이 절대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사람이라기 보다 대체적으로 道를 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올바른 방향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두번째 문장은 앞에 聖人이 만물을 만들어낸다고 하면 너무 의미가 거창해져서 그보다는 기본적인 방향성을 주고 의미를 만들어낸다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만사에 있어서 누군가 최초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과정은 필요하니까요.  이를테면 다윈이 진화론을 알아내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알아내었더라도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알아낸 대상을 소유하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우주를 어떻게 소유합니다.) 


이에 두번째 문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성인은 만물의 의미를 찾아내어도 무언가를 바라여서 하는 것이 아니며, 가치를 찾아내어 의미를 찾아주어도 이를 소유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위의 두문장에서 이어서 계속 道를 행하는 기본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恃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 그대로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어떤 자신만의 신념을 앞에 깔고 간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무언가 뒷일을 믿는다 (기대한다)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죠. 하지만 뒤의 내용들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은 먼가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어떤 일을 하고나서 그 과정을 너무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뒤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일단 첫 문장을 해석하면 뒤에는 다소 쉽게 해석되는 느낌입니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 과정만이 옳다고 믿지 않으며, 힘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서 그 이룩한 바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성취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번의 성취에 만족하고 뒤에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는 일이죠. 기업의 예를 들면 더 이해가 쉬울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초대박 상품을 하나 만들어내게된다면 이후 아무 것도 안해도 그 제품이 천년 만년 그 회사를 먹여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혁신과 개선이 이루어져야되는 것이죠. 그런 과정이 있어야 이전의 성과가 의미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번 수립된 개선의 경험은 다음 또 그 후의 개선에 Reference가 될 수 있습니다. 어디 사라지는게 아니죠. 풀어서 생각하면 위의 두 문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려한다

또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만들려 한다. 

有와 無는 서로 상생하는 방식으로 공존하며, 어려움과 쉬움이 상호 보완관계에서 성립되고, 

길고 짧음이 있어 비교를 할 수 있으며, 높고 낮음이 있어 경사가 이루어지며, 

음악과 목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가 있어 순서를 정해 진행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이에 자기 주장을 억지로 고집하지 않으며, 

남들을 가르킴에 있어서도 장황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교화한다.

만물의 의미를 찾아내어도 무언가를 바라여서 하는 것이 아니며, 

가치를 찾아내어 의미를 찾아주어도 이를 소유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 과정만이 옳다고 믿지 않으며, 힘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이룬바에 만족하여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서 그 이룩한 바가 없어지지 않는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1장

2018. 11. 11. 09:16 from BoOk/pHiLoSoPhY

道可道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始 무명 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 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고 상무욕이 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 관기교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동 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시간 나는데로 틈틈히 노자도덕경 내용을 정리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 부문 말도 안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차피 개인적으로 정리하는 것이고, 시중에 나와있는 책들도 내용이 제 각각이니 여기 글 하나 올린다고 큰 일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노자도덕경은 우선 道와 名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비상명

 

모르는 한자는 하나도 없는데 보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지 싶다. 


생각 해보자면 사람들은 무언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대상을 규정하고 (Naming) 그 후 대응 방안을 만들어 낸다. (Solution이나 Rule) 노자도덕경은 그러한 대응방안()과 대상을 규정하는 행위 ()로부터 시작한다.

 

첫구절의 세문구 道可道는 이미 해결책이 나와있는 방안 정도로 해석하였다.

名可名 또한 이미 정의된 대상, 이름이 주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각 문구 뒤의 非常道와 非常名은 무슨 의미일까? 常자는 "항상 상"자이므로 常道와 常名은 변하지 않는 방안과 변하지 않는 정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않을까 싶다.  

 

위의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풀어서 첫 두줄만을 정리하자면

 

"이미 수립된 법칙이나 해결책이 있더라도 이것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어떠한 대상에 대해 내려진 정의도 영구 불변하지는 못한다."

 

인간들이 수립한 모든 법칙이나 규칙, 관습, 제도 등은 시간이 지나면 수정 / 보완되고, 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금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그리고 100년 200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이 드물다. 


이런 사례는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동안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지구가 광대한 우주의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나라는 수년 전까지 외도를 저지르면 법으로 간통죄를 처벌하였으나, 이제 그 법은 폐지되었다. 이름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불과 백년전에는 한양이나 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그보다 더 오랜 옛날에는 숱한 다른 지명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아직도 고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논쟁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왕검성이 어디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이론들이 펼쳐지고 있다.


변하지 않는 법칙은 없으며, 주어진 이름 또한 영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물지모

 

여기 두 줄을 단순히 직역하면 "無名은 천지의 시작이며, 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정도로 해석이 될 수 있겠다. (어? 간단히 해석되네... 그런데 무슨 말이지?) 해석해놓고 보니 무슨 의미인지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단원은 名에 대해 한단계 더 설명을 자세히 하는 문장이라고 이해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천지가 시작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無名이었으나 (정의됨이 없었으나) 만물이 생겨남에 따라 有名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다)."


이를테면 뭐 김춘수의 "꽃"과 같은 문장이라고나 할까? 의미없던 무수한 세상의 모든 것들 중의 하나에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그런... 


다른 의미로 생각하자면 無名사람들이 정의 내리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이므로 천지의 모든 대상을 말하는 것이며, 有明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부여된 대상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통계를 할 때 관심을 가지는 대상 전체가 모집단이라고 한다면 이 전체에 대해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그 중 일부는 표본집단으로 선출하여 이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짓고 방안을 수립하더라도 이는 전체 광대한 우주의 모든 현상 중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일부에 대해 차츰 그 영역을 넓히면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고상무욕이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관기교(요) 

 

이 구절의 앞의 세 단어는 항상 無欲이라고 해석될수도 있겠지만 常無를 欲한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욕구가 있냐 없냐로 문장이 넘어가는 것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었고 非常을 常無로 바꿔서 표현한 것이라는 쪽으로 이해하면 좀더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欲이라는 글자도 바란다나 욕망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의미 전달이 다소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하고자한다는 식의 의미로 해석했다. 


위의 내용이 모든 것이 영구불변하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점에 대해 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이를 전제로 모든일을 해나가려 한다면 ..."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밑의 문장은 "변치않고 영속하는 것을 찾는다면..."으로 대치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은 妙와 徼에 대해서 적절한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한데 상호 대치되는 개념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해석도 필요했다. 妙라는 단어는 사실 그 사전적 의미가 다소 확실해서 이론의 여지가 달리 없을 것 같다. 묘책이나 묘약이라는 단어서 쓰이는 의미를 생각하면 잘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어렵게 찾아낸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의미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구하다, 순찰하다, 돌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돈다"는 내용에 주목했다. 妙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궁극의 진리나 해결책이라면 徼는 밖으로는 들어나 있으나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변모한다는 것이 아닐까?


위의 내용들은 정리하여 이 두줄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고 무언가를 해나가려 한다면 그 깊은 진리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 종시 불변하는 영구불변의 것을 원하고자 한다면 결국 그런 것은 없으며 한 때의 진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 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1장의 마지막 두 문구다. 여기서 兩者는 마지막 異名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無名과 有名이라고 유추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즉 有名과 無名은 다른 이름을 가졌으나 같은 근원을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사실 이 다음 문구가 해석이 다소 난해하다.


우선 두번째 문구의 同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위에서 이야기한 근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異名을 가진 有와 無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모두' 또는 '같이'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모두'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玄이라는 말도 어떤 의미인지 모호하다. 玄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사실 간단하다. 천자문 제일 첫문장에 나온다. (天地玄黃) 검을 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다른 의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딱히 어느 의미가 적합할지도 의문이다. 다른 의미로도 해석을 하려 했는데 대학 1장을 읽다보니 반대되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1장의 첫 구절은 "大學之道 在明明德"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明"자는 구성원들 간의 Consensus가 이루어진, 쉽게말하자면 뻔한 상식, 당위성을 가진 덕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玄"은 그 반대로 아직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또는 더 깊이 의미를 가지자면 미쳐 고려의 대상이 되지못한 대상을 가르키기 위해 사용된 형용사로 보았다. 


위의 내용들을 반영하여 두 문장을 해석하자면


"이 두가지 無名과 有名은 이름은 다르나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니, 이 모두는 어두운 무지의 영역에서 비롯되어 玄이라 이른다. 어둡고도 어두우나 모든 근본적 이치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Six Sigma의 기본 절차는 DMAIC다. Define / Measure / Analyze / Improve / Control 인데, 우선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규명하고 (Define) 이후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확인을 위해 측정 (Measure) 및 분석 (Analyze)를 하며 이후 이에 대한 개선 (Improve)와 개선 이후의 관리 (Control)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자 첫장의 名은 결국 Define / Measure / Analyze 절차와 관련되며 뒤에 계속 언급될 道에 대한 이야기는 Improve 및 Control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위에 이야기한 내용들을 묶어서 아래와 같이 풀어본다.


"이미 수립된 법칙이나 해결책이 있더라도 종래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어떠한 대상에 대해 내려진 정의도 영구 불변하지는 못한다. 천지가 시작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정의됨이 없었으나, 만물이 생겨남에 따라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 나름 대상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고 무언가를 도모한다면 그 깊은 진리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 종시 불변하는 영구불변의 것을 찾고자 한다면 결국 그런 것은 없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대상이어도 의미가 변해가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이 두가지 無名과 有名은 이름은 다르나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니, 이는 드러나있지 않았던 어두운 무지와 미지의 상태이다. 어둡고도 어두우나 결국 모든 근본적 이치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Posted by Tony Kim :

기독교 성서의 이해
국내도서
저자 : 김용옥
출판 : 통나무 2007.03.04
상세보기


누가 그랬는지 기억이 좀 잘 안나는데 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더니
 
"교회 다니기로 했냐?"
 
꼭 교회를 다녀야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건 아니지 않는가?
뭐 불경 한번 읽으려면 우선 절부터 가야 하나? 암튼간에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될 가능성도 없지만 궁금한 것도 있고 마침 알고싶던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사서 읽었다.
 
책 내용이 아주 어렵다기 보다는 요즘 마지막 학기에 들어와서 책 읽기가 좀 애매하게 되어 책 사고 약 1달만에 다 읽었다.
 
암튼 얘기하자면 흥미있는 책이다.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건 예전에 성당에 다닐까 생각하고 한달 동안 정말로 다녔었는데 주구장창 기도문만 외우고 성가만 외웠지 전반적인 아니 교인으로서 최소한 가져야할 상식 정도도 안 가르켜주는 것 같았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무조건 믿습니다, 라는 건가? 물론 모든 건 보는 입장에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조차도 너무 읽을 만한 것들이 없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내용은 초기 교회 시작에서부터 니케아 공회까지의 과정을 통해 로마카톨릭이 중심이 되는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를 거치고 아무튼 그의 가르침은 구전되고 필사되어 전해졌을 것이며 유일신 종교의 숙명으로 정통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졌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누가:51절).
 
이병 때 이 구절을 읽고 얼마나 오싹했는지 모른다. 입장에 따라 얼마나 다른 해석이 가능한 구절인가. 기독교는 어찌되었든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는 주류 종교 중의 하나이며 흥미를 가져 볼만한 대상이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