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38장

2023. 6. 19. 15:47 from BoOk/pHiLoSoPhY

上德不德 是以有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下德爲之而有以爲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有以爲
상인위지이유이위
上義爲之而有以爲
상의위지이유이위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상례위지이막지응 즉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시이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처기실 불거기화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덕이 높으면 (사사로운) 덕은 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덕일 수 있다.”
 
38장은 德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上德不德이라는 문구는 天地不仁으로 시작되었던 5장의 내용을 연상하게 합니다. 천지가 그 나름의 방식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특정 대상으로의 치우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38장에서도 첫 문장은 “높은 덕은 덕이 없다.”라고 역설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는 “특정 대상에 치우쳐 사사로운 덕을 배풀지는 않는다”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른바 덕을 베풀고, 덕을 봤다라고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내가 덕을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자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한정된 자원을 나와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 또는 그런 사람들 먼저 베푼다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사람들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정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될 수 있고, 또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민해야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노자는 높은 덕은 부덕하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是以有德 그래야 덕이 유지될 수 있다, 덕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덕이 낮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덕을 잃지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덕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낮은 德은 특정 대상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 연연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이런 편파성이 계속된다면 구성원 전체적으로는 Leader의 행위를 진정한 덕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특정 대상에 특혜를 베푸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게되죠. 이런 행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사람들도 덕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게되는 즉 無德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권한이 주어지게되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이 우선 생각되기 마련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부터 우선 챙기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기만 이런 행위가 단기간 영향이 낮은 수준에 그친다면 몰라도, 구속력 있고 영향력이 높은 정책이나 방침으로 정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선택은 德이라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 자원을 배분할 때에는 그 수혜의 총량을 어떻게 하면 널리 그리고 최대화 시킬 수 있는가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특정 대상에 치우치는 선택을 해서는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덕이 높은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러려니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덕이 낮다는 것은 어디론가 치우치고, 독선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강요하는 것이다.”
 
“以爲”라는 문구는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문구는 높은 덕을 이룬다는 것은 특정 대상에게 치우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에 그게 옳다라고 근거도 없이 선입견을 가져서도 않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그러한 결과물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혹은 특정 방향에 치우친다던가, 아니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한 방향을 고려하여야 上德 즉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라는 의미죠.
 
반면에 낮은 덕은 특정 대상만을 위하고, 혹은 무언가 하고자하는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관습이라던가, 선례라던가 아니면 사심에서 비롯된 이유로 “이런 경우에는 이래야만 해!”라는 전제를 깔아놓으면, 下德 즉 그냥 그런 혹은 불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게된다는 거죠.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仁이나 義라는 것은 그 수준이 높다고 한들, 낮은 덕과 같이 그 지양하는 바가 있으며,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下德爲之而有以爲이라는 문구에서 下德이라는 단어가 上仁과 上義라는 단어로 치환이 되어있습니다.
 
즉, 위에 말한 것을 참고하면 높은 仁이나 禮라는 것도 결국은 결국 무언가 의도한 바를, 특정한  대상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행위 밖에 안된다는 이야기로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교의 핵심 Code인 仁義禮智信 중 첫 세가지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유교를 Target으로 비판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德이라는 가치보다도 仁은 아무리 높아도 그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을까요? 생각하면 노자가 생각하는 방향과 유교의 지향점이 매우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유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되지만 세상에는 명확히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 있고, 노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기준에 도달하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요, 순과 같은 성인이 지향점이 되는거고요.
 
무언가 지향점을 놓고, 임금이나 부모 등 기득권에 충성해야된다는 유교의 이론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을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
예라는 것도 무언가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요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따르지 않으면, 어께를 걷어올려 그를 부수고 깨뜨리려 한다.”
 
禮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높은 비판을 노자는 가하고 있습니다. 고도화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예절 혹은 예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통치자의 혹은 권력자의 의도된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런 사상이나 정책에 따르지않는 무리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이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제국들은 상대를 야만이라는 표현으로 공격하며 침탈의 근거로 삼았던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교와 이단에 대한 공격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효종 사후 수많은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은 그 복제에 대한 각 정파의 해석과 비난이 근거를 이루었었습니다. 禮가 본래 내걸었던 타인을 공경하고 아끼는 적절한 표현 방식에서 벋어나 이방인을 배척하고 탄합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노자는 보았던 것 같습니다.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이런 이유로 도를 잃으면 덕을 찾게되고, 덕을 잃으면 인을 찾으며, 인을 잃게되면 의를 찾게되고, 의를 잃으면 예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道부터 禮에 이르게되는 관점을 보여주는 문구입니다. 道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게되면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배분하는 德이라는 방식에 의존하게되며, 이러한 德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내가 존경을 받게라도 하여야하는 仁이라는 방식을 모색하게 되고,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 우리끼리의 義理를 잃지않도록 사람들은 고민하고, 그 의리에도 기댈 수 없다면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강압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무릇 예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란 충과 믿음이 얄팍하니, 혼란의 시작이 된다.”
 
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위의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忠이라는 글자는 마음을 나타내는 心자 위에 가운데를 나타내는 中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의 중심 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中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기계적인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中은 Bull’s Eye 즉 핵심이 되는 가장 적합한 상황을 가르키는 단어라고 이해해야될 것 같습니다. 즉 忠은 가장 적합한 마음상태 또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가르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忠 그리고 미혹되지 않는 믿음 (信)을 남에게 주지 못하는 자들이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禮를 들이밀며 상대를 겁박한다면 시작부터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합니다.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이들은) 나 홀로 앞을 내다본다 이야기하며 자신이 내세우는 방도를 미사여구로 꾸며대니, 우환의 시작이 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기대어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본인만이 앞을 내다본다고 고집하면 밑에 사람들은 그 방도가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칭송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조직에는 소신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내가 다 아는데 말이야” 라는 식으로 전제를 깔아버리는 여기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일은 결국 기대에 못 미치거나 엉망이 되기 십상이고요.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이런 이유로 대장부는 그 바탕이 두텁고 탄탄한 곳에 머물며, 근거와 정당성이 희박한 곳에는 머물지 않으려 한다. 또한,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려 하지 겉만 화려한 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노자의 이야기는 화려한 예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례허식에 눈을 가리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흔히 정당성이 떨어지는 정권은 아무 실속이 없는 거대한 행사나 예복에 집착합니다. 전제국가의 독재자들을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보면 초라한 나라에 걸맞지않는 수많은 훈장과 금빛 메달로 군복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 보다는 대부분 촌스럽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대장부라면 우리의 선택이 어떻게 되어야 실익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일부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두텁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된다 이야기 합니다.
 
故去彼取此
고로 표면을 덮고있는 것을 걷어내어 그 안의 실질적인 것을 취한다.”
 
禮라는 화려한 외피를 걷어내어 그리고 禮로서 공고화된 기존 질서를 벋어나서 무엇이 정말 더 나은 방향인가, 무엇이 더 혁신할 수 있는 한단계 더 나갈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고민해야된다는 이야기로 노자는 38장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22년 독서 목록

2023. 1. 1. 13:13 from BoOk

1.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2.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Matt Haig)
3. 메트로폴리스 (벤 윌슨)
4.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B. 피터슨)
5. 프랑스 혁명사 6권, 헌법의 완성 (주명철)
6. 용서로 가는 네가지 길 (어슐러 K. 르귄)
7. 우주 시간 그 너머 (크리스토프갈파르)
8. 저주토끼 (정보라)
9. 마음의 법칙 (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10. 프랑스 혁명사 7권, 제 2의 혁명 (주명철)
11.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12. 프랑스혁명사 8권, 피로 세운 공화국 (주명철)
13.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14. 요즘, 일본 (공태희)
15. 우울할 땐 뇌 과학 (엘릭스 코브)
1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 실록 (박영규)
17. 백년전쟁 1337-1453 (데즈먼드 수어드, 再讀)
18. 길가메시 서사시 (앤드류 조지)
19. 담마빠다 (일아 스님 옮김)
20. 지금 비스마르크 (에버하르트콜브)
21. 무질서가 만든 질서 (스튜어트 A. 카우프만)
22. 술 잡학사전 (클레어버더)
23. 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24. 달의 궁전 (폴 오스터)
25. 프랑스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주명철)
26.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민까지 (노명식)
27. 하얼빈 (김훈)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7장

2022. 5. 19. 14:01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통상 어떤 특정 대상을 위주로 하지않아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無爲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않는다라는 더 심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데로 내버려둔다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그런 의미라면 노자는 애시당초 이런 책도 쓰지 말았어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데로 내버려두라고 하려면 이런 글도 쓰는게 아니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변화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오며, 기회의 모습으로도 다가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변화에 대응해야 되며, 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처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에서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대응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전체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해야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단체들만을 위한 방도는 결국 그 집단에게도 해가 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세계의 많은 독제국가나 부폐한 나라들을 보면 특정 계층은 모든 부를 독차지하며 그 기회를 누리는 듯하지만 그 계층 사람들도 경호원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최악의 경우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언제든 최악의 경우로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것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법도 규칙도 관습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최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특정 방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공동체 전체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치지 말아라. 그래야 진정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도덕경 37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왕후들이 이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발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위의 첫 문장은 새로운 방도를 마련함에 있어 지향점 또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즉 전체 이익을 고려하지 어느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태도를 버린다면 그 새로운 방안의 영향을 받게되는 대상들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변화하고 지향하는 바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흔히 결과의 공평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불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의 공평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부당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생각되면 이러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은 조직을, 사회를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들은 이러한 점을 항상 고려하여 일을 추진해야된다고 이야기합니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무언가를 화합하여 만들려할 때, 우리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원소재를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도록) 엄밀히 통제하면서 일을 추진할 것이다.”

 

化라는 단어가 앞 문구에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변화한다는 의미보다는 화합한다는 (또는 조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기존의 또는 현존하는 무언가를 조합하여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作) 있을 테니까요.

 

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띄기 전 원재료 상태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無名이라는 단어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들을 조합하여 또는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새로운 법칙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鎭 즉 진압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 많은 경우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억누르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억눌러야할 대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엄밀히 또는 매우 조심하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큰 대리석 원석을 쪼아내어 조각상을 만들어낼 때 덜어낼 부분과 남길 부분을 매우 조심해서 작업하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식의 해석은 노자의 내용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아직 규정되지 않은 밑바탕 단계라면, 이 또한 어떤 지향하는 또는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에서 가르키는 것처럼 엄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관리 하에 새로운 것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재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통나무는 (樸)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나무 그릇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도끼 자루가 될 수도 있으며, 악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철처한 계획과 숙련된 작업자의 통제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통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업자의 문제인거죠. 통나무는 무엇을 되고싶다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통나무를 탓할 수 없듯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원들의 열망과 역량이 갖춰져 있더라도 잘못된 리더의 생각과 독선에 의해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리한 욕심이 없으면 안정될 것이며, 천하가 장차 자발적으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위의 無欲과 이 문장에서의 不欲은 주어가 다른 대상을 가르키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이 원재료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無欲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不欲은 리더가 무언가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자신을 위한 또는 Inner Circle을 위한 욕심을 가지게되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됩니다. 특히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은 엄밀히 말하자면 위임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활용한다면 분란이 발생될 소지만을 키우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자세를 버리면 靜 즉 조직이, 사회가, 구성원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가게되고 더불어 적절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죠.

 

37장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편견을 가지거나 개인적 욕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과 대신 편견과 아집 그리고 독선을 버리고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면 사회는 계속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