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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01 22년 독서 목록
  2. 2022.05.19 노자도덕경 37장
  3. 2022.04.18 노자도덕경 36장
  4. 2022.03.29 노자도덕경 35장
  5. 2022.03.15 노자도덕경 34장
  6. 2022.02.18 노자도덕경 33장
  7. 2022.02.16 노자도덕경 32장
  8. 2022.01.18 노자도덕경 31장
  9. 2022.01.13 노자도덕경 30장
  10. 2022.01.10 노자도덕경 29장

22년 독서 목록

2023. 1. 1. 13:13 from BoOk

1.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2.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Matt Haig)
3. 메트로폴리스 (벤 윌슨)
4.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B. 피터슨)
5. 프랑스 혁명사 6권, 헌법의 완성 (주명철)
6. 용서로 가는 네가지 길 (어슐러 K. 르귄)
7. 우주 시간 그 너머 (크리스토프갈파르)
8. 저주토끼 (정보라)
9. 마음의 법칙 (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10. 프랑스 혁명사 7권, 제 2의 혁명 (주명철)
11.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12. 프랑스혁명사 8권, 피로 세운 공화국 (주명철)
13.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14. 요즘, 일본 (공태희)
15. 우울할 땐 뇌 과학 (엘릭스 코브)
1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 실록 (박영규)
17. 백년전쟁 1337-1453 (데즈먼드 수어드, 再讀)
18. 길가메시 서사시 (앤드류 조지)
19. 담마빠다 (일아 스님 옮김)
20. 지금 비스마르크 (에버하르트콜브)
21. 무질서가 만든 질서 (스튜어트 A. 카우프만)
22. 술 잡학사전 (클레어버더)
23. 이야기 독일사 (박래식)
24. 달의 궁전 (폴 오스터)
25. 프랑스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주명철)
26.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민까지 (노명식)
27. 하얼빈 (김훈)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7장

2022. 5. 19. 14:01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道常無爲 而無不爲

道는 통상 어떤 특정 대상을 위주로 하지않아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無爲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않는다라는 더 심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데로 내버려둔다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그런 의미라면 노자는 애시당초 이런 책도 쓰지 말았어야 하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데로 내버려두라고 하려면 이런 글도 쓰는게 아니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변화는 위기의 모습으로도 오며, 기회의 모습으로도 다가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변화에 대응해야 되며, 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처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에서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대응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전체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해야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단체들만을 위한 방도는 결국 그 집단에게도 해가 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세계의 많은 독제국가나 부폐한 나라들을 보면 특정 계층은 모든 부를 독차지하며 그 기회를 누리는 듯하지만 그 계층 사람들도 경호원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최악의 경우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언제든 최악의 경우로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 것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법도 규칙도 관습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최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특정 방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공동체 전체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치지 말아라. 그래야 진정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도덕경 37장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왕후들이 이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발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위의 첫 문장은 새로운 방도를 마련함에 있어 지향점 또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즉 전체 이익을 고려하지 어느 특정 대상만을 위하는 태도를 버린다면 그 새로운 방안의 영향을 받게되는 대상들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 방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변화하고 지향하는 바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흔히 결과의 공평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불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의 공평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부당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생각되면 이러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은 조직을, 사회를 그리고 나라의 안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들은 이러한 점을 항상 고려하여 일을 추진해야된다고 이야기합니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무언가를 화합하여 만들려할 때, 우리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원소재를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도록) 엄밀히 통제하면서 일을 추진할 것이다.”

 

化라는 단어가 앞 문구에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변화한다는 의미보다는 화합한다는 (또는 조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기존의 또는 현존하는 무언가를 조합하여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作) 있을 테니까요.

 

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던 단어입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띄기 전 원재료 상태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無名이라는 단어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들을 조합하여 또는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새로운 법칙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鎭 즉 진압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 많은 경우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억누르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억눌러야할 대상도 아닌 것 같습니다.

 

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엄밀히 또는 매우 조심하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큰 대리석 원석을 쪼아내어 조각상을 만들어낼 때 덜어낼 부분과 남길 부분을 매우 조심해서 작업하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식의 해석은 노자의 내용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아직 규정되지 않은 밑바탕 단계라면, 이 또한 어떤 지향하는 또는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위의 문구에서 가르키는 것처럼 엄정하고 철저한 계획과 관리 하에 새로운 것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재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통나무는 (樸)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나무 그릇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도끼 자루가 될 수도 있으며, 악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철처한 계획과 숙련된 작업자의 통제 하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통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업자의 문제인거죠. 통나무는 무엇을 되고싶다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통나무를 탓할 수 없듯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원들의 열망과 역량이 갖춰져 있더라도 잘못된 리더의 생각과 독선에 의해 결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리한 욕심이 없으면 안정될 것이며, 천하가 장차 자발적으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위의 無欲과 이 문장에서의 不欲은 주어가 다른 대상을 가르키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이 원재료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無欲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不欲은 리더가 무언가 의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자신을 위한 또는 Inner Circle을 위한 욕심을 가지게되면 반드시 사단이 나게됩니다. 특히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은 엄밀히 말하자면 위임된 것에 불과한데 이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활용한다면 분란이 발생될 소지만을 키우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자세를 버리면 靜 즉 조직이, 사회가, 구성원이 안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가게되고 더불어 적절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죠.

 

37장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편견을 가지거나 개인적 욕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과 대신 편견과 아집 그리고 독선을 버리고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면 사회는 계속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6장

2022. 4. 18. 16:36 from BoOk/pHiLoSoPhY

將欲翕之 必姑張之

장욕흡지 필고장지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욕약지 필고강지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욕거지 필고여지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욕탈지 필고여지

是謂微明 柔弱勝强

시위미명 유약승강

魚不脫於淵

어불탈어연

國利器 不可以示人

국이기 불가이시인

 

將欲翕之 必姑張之

하나로 무언가를 모으려 한다면, 잠시 그 대상들을 벌려놓아 운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도덕경 36장은 해석에 있어 다소 논란이 되는 장입니다. 첫 문장의 내용과 비슷한 구조의 내용이 네번째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의 내용을 권모술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翕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합한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를 축소시킨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경쟁자나 아랫사람 중 경계해야될 대상을 몰락시키고 싶다면 일단은 잠간이라도 권한을 더 주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약하게 하려면 잠간 강하게 만들어봐라, 제거하려는 대상이라면 잠간은 같이 해라, 라는 식으로 해석하여 속으로는 검은 마음을 품었지만 겉으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이중적 모습의 냉혹한 리더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36장에서 앞뒤 맥락없이 경쟁자를 몰락시키는 노하우를 말하는 것은 다소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서 고기는 연못을 못벋어난다는 얘기와도 연결되는 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요.

 

오히려 이번 장의 내용은 검증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변화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였습니다.

 

첫 문장의 내용 중 “將欲翕之”라는 말은 기존의 방법이나 정책을 무언가 다른 것과 통합을 하는 변화를 추진하려할 때,  더 나은 방향으로 조정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을 때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必姑張之라는 이야기는 이런 시도에 앞서 잠시만이라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확대해서 운영해보자는거죠. 그렇게 하면 이러한 대상 Process의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이를 통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가 가늠할 수 있게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지방정부에서 대중교통 전용차선 운영을 검토한다고 생각해보죠. 이 경우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주말만 아니면, 주중만 운영하는 것을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기간을 정하고 한달 정도 전면 시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고 뭐가 보완되어야 할 내용인지, 그리고 좋은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하면 더 나을지를 확인하기 나을 수 있습니다.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전면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아니면 이제 폐기를 검토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면, 과연 이런 결정이 맞는지 잠간이라도 나의 의도와 반대방향으로의 검증차원의 운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 뒤의 문구들도 거의 같은 의미 입니다.

 

將欲弱之 必姑强之

장차 약화시키고져 하는 사항이 있다면, 잠시라도 강화시켜 운영해볼 필요가 있다.”

將欲去之 必姑與之

장차 제거해야될 항목이 있다면, 잠시라도 같이 하여 정말 제거해야될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將欲奪之 必姑予之

장차 그 권한을 빼앗아야할 대상이 있다면, 일단 권한을 주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화할 필요가 있다.”

 

상기 네 문구의 내용은 거의 모두 현재 있는 것들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는 등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강화시키는 것도 힘든 과정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무언가를 축소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큰 조직일수록 각 조직의, 그리고 담당자에게 주어진 업무가 있고 또한 그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다보면 어떠한 업무 Process에 대해서는 기존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 보다 새로운, 아니면 다른 조직에서 운영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의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동의 과정없이 리더의 판단만으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조직의 반발은 둘째 치고 독선에 의한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권한이나 업무 과정을 약화시키고 들어내고 다른곳으로 옮기기에 앞서 정말 이런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확인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대상이 되는 항목에 대해 강제로라도 증폭시켜서 아니면 집중 검증하여 정말 그 결정이 옳았는지, 파악해야된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是謂微明 柔弱勝强

이를 미명, 즉 잠간 동안의 시간을 두어 명확화하는 과정이라 한다. 강제로 무언가를 변경시키는 것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微明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희미하게 밝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微라는 단어가 매우 작은 상황이나 순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明이라는 단어가 그 대상의 장단점과 이슈 및 리스크를 명확히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微明이라는 단어는 어떤 대상을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파악됩니다.

 

柔弱勝强이라는 문구는 柔弱함이 强함을 이긴다라고 해석되는데, 거꾸로 해석하면 어떤 변화를 모색할 때 너무 강압적으로 추진하기 보다 비록 약하더라도 유연한 방안을 채택하는 것이 더 성공확율이 높다라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당장 시간이 더 걸릴터이고 무조건 ‘내말이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는 약하게 비춰질 수 있으나, 결국 더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거죠.

 

경험적으로도 새로운 책임자들이 자리에 올라 기존의 절차를 용도폐기 시키고 새로운 방법을 강압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고 합니다. 하기만 이럴 때 대부분 그 분께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절차도 같이 운명을 다하곤 하죠. 그리고 그 분께서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냥 하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거죠.

 

왜일까요?

 

魚不脫於淵

물고기는 연못을 빠져나올 수 없다.”

 

물고기 보고 살고 있던 연못을 빠져나오라고 하면, 그 물고기는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 연못은 이미 먹이가 다 고갈되어가거나, 오염이 임박했거나 하더라도 그 연못 안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던 물고기는 그 필요성을 좀처럼 절감하기 힘들 겁니다. 내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실상 그 절차에 익숙한 사람은 변화의 필요에 대해 실증을 하기 전까지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듭니다. (특히 권한이 축소되어나 없어지는 경우라면 더욱 심할 겁니다.)

 

숲 속에 있으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비유와도 비슷한 경우죠. 권한 조정의 대상이 되는 상대는 대부분 기존 절차나 Process, 또는 생활에 익숙해져있어 더 나은 방식으로의 변경에 대해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힘들기 쉬우며, 심한 경우는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기 십상입니다. 

 

國利器 不可以示人

나라에 도움이 되는 도구는 사람들에게 지시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변화라고, 또는 새로운 절차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지시만 한다고 이루어지고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에 따른 이익을, 효과를 그리고 향상에 대한 가능성을 직접 보여주고 몸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기존의 것을 과감히 떠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자 36장은 안주하려는 조직을 어떻게 변모시켜야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검증과 공감을 통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5장

2022. 3. 29. 16:23 from BoOk/pHiLoSoPhY

執大象, 天下往

집대상, 천하왕

往而不害, 安平太

왕이불해, 안평태

樂與餌, 過客止

낙여이, 과객지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執大象, 天下往

영향력이 큰 것을 이해하고 통제해야, 천하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기 된다.”

 

이번 장은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첫번째 문장은 이러한 실행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執大象” 즉 큰 대상을 잡고 흔들어야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그래야 천하가 往 즉 온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올 往이라는 한자는 나를 중심으로 상대가 온다라는 의미이므로 천하가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는 천하의 사람들이 나에게로 모여든다, 관심을 받아 변화를 주도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문구는 통계에서 사용되는 파레토 법칙을 연상시킵니다. 파레토 법칙은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의 20%의 영향에 비롯된다는 이론인데요, 결국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이를 대상으로 개선을 추진해야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往而不害, 安平太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결과가 해롭지 않도록 추진해야 하며, 걱정없이 평안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선활동의 지향점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뒤의 세글자 安平太를 앞의 구절의 영향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해롭지 않으면 평안하다는 것은 좀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어지는 말로 보았습니다.

 

往而不害라는 말은 직역하면 ‘다가오니 해롭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다가오지 않으면 해롭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머물면, 안주하면 해롭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거죠. 어찌되었건 안주해서는 안된다. 머물지 않고, 변화를 주도해야 위태롭지 않다. 그래야 더욱 안전해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太라는 글자는 앞의 安이나 平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太라는 글자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더불어 더욱 커질 수 있다. 즉 성장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어느 학생이 큰 방향 전환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이나 습관을 개선하여 이전보다는 더 편하게 (安) 더 쉽게 (平) 문제를 풀 수 있게되었다고 생각해보죠.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다보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되는거고, 무언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太라고 생각할 수 있지않을까 봅니다.

 

樂與餌, 過客止

같이 하는 사람들을 즐겁고 배부르게 해야한다,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조차 멈출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냥 이 문장을 직해하면 ‘먹고 즐거우니 지나는 손님도 가는 걸음을 멈춘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내용을 생각하면 결국 이 문장은 변화의 지향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道가 수많은 방편 중의 하나라면 德은 이중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 한바 있는데 결국 이 문장은 그 덕의 일면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나는 나그네를 여기서 언급한 것은 우리들만의 주관적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보아도 객관적으로 변화의 방향이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냥 자극적이도 단기적인 성과가 아닌 누가 보아도 공감할만한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져야된다는 거죠..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모든 도의 마지막은 맛이 거의 없는 담담한 상황과 같다.”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해야되나 사실 조금 고민을 했었습니다. 出口를 한 단어로 생각하여 도의 출구라고 생각하여야 할지 그리고 淡이라는 단어는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될지도 잘 판단이 서지를 않더군요.

 

결론적으로 出口는 문자 그대로 끝나는 지점, 빠져나오는 상황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道는 영원하지 않고 마지막이 있으며, 맛이 없는 담담한 상황은 이미 주변에 그 방식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왔었던 길이 이제는 끝났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는 본인이 결정해야됩니다.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기준은 결국 어느 쪽이 더 이익이 되는가, 어느쪽이 우리에게 안정을 줄 것인가, 어느쪽이 지금까지의 관행이나 방식보다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겠는가에 지향점을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활동을 집중해야되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 문장으로 철두철미한 그리고 치열하게 집중하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단순히 보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주시하라, 단순히 듣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경청하라, 또한 단순히 써서 없에는 것은 부족하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도록 활용하라.”

 

보고, 듣고, 고민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냥 쳐다보거나 건성으로 듣지말고 집중해서 그 의미를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자 35장은 이제 것 이야기하였던 모든 道는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강조함과 더불어 치열하게 무엇이 진짜 원인이고 어떤 것을 움직여야되는지 그리고 그 지행점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4장

2022. 3. 15. 14:15 from BoOk/pHiLoSoPhY

大道氾兮 其可左右

대도범혜 기가좌우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常無欲 可名於小

상무욕 가명어소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이기종부자위대 고능성기대

 

 

 

노자도덕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道와 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道라는 것이 단순히 방도를 가르키는 단계에서는 道에 대한 가치 평가가 주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야기한 바와 같이 좋은 道도 있을 수 있고 그냥 그런 혹은 나쁜 道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여러 생각해낼 수 있는 道 중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하거나 나은 방도를 채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가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인지, 구성원 대다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德이라는 가치 개념이 더해지게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大道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大道氾兮 其可左右

큰 도는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 좌우를 가리지않고 모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넘치게 되면 그 물은 어느 특정 방향만으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에 그 그릇이 놓여있는지에 따라 방향에 정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방으로 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大道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일단 발현이 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즉 그런데 이건 꼭 좋은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둬야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악법이 있다고 하죠. 아니면 선의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악영향을 미치는 법일 수도 있고요. 모든 국민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게됩니다. 이 역시 大道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특정 인원들 혹은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가 악영향을 입게된다면 결국 그 피해를 중장기적으로는 피할 수 있는 집단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34장에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大道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중 긍정적인 의미의 방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받아들임에 사양함이 없다.”

 

“辭”라는 단어는 설명하다 혹은 사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 문구의 주어인 만물이 아니라 “道”를 혹은 그러한 “道”를 실현하는 사람, 즉 군주를 주어로 인식하여 뒤의 세단어로 이루어진 문구를 해석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만물이 大道에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大道는 이러한 역할을 함에 사양함이 없다,라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왜 군주가 사양을 한다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않고,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大道를 부끄럼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두번째 문장은 결국 첫 문장에 언급한 大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는 물이 넘치듯 이미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그 구성원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고, 그래서 구성원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삶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이야기죠.

 

그러므로 노자에서의 大道는 어떤 거대한 담론을 의미하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은 방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거대담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활화가 되어버린 도구나 관습, 법률, 이론 등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죠. 각 나라마다 수를 표기하는 방법은 각각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0, 1, 2, 3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로마자나 한자로 수를 표기하지는 않습니다.

 

功成不名有

이름이 있지 않은 곳에, 즉 소외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상에 대해 성과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이러한 大道는 어떤 기본적 자세를 가지고 진행되어야 할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萬物 즉 많은 영역이나 대상을 아우르는 방안이 大道라고 한다면, 노자는 그 노력이 지금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아니면 미지의 영역이었던 곳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기존의 방안을 제 아무리 갈고 닦아본들 이미 수혜를 받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용이 되고 있던 대상에서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리되지 못했던 즉 여기서 ‘不名’이라 표현된, 즉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르게는 무언가 큰 한방을 (여기서 말하는 大道) 만들기 위해라면 뭔가 큰 담론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직 미비한 구석이 없는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살피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첫장에서부터 말하듯이 모든 이슈에 대한 해결방안은 혼돈 상태인 無로부터 시작합니다. Chaos 상태에 이름을 주고 (대상을 한정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질서를 부여하는 시작점이니까요.

 

이 문구는 다르게 생각하면 통치라는 것은 아직 손길이 닿지않은, 소외받은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방안을 만드는 것이 이미 충분히 가진 대상들을 위한 것이 된다면, 사회의 균열은 가속화될 것이고 분쟁이 증가하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향평준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한선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통해 사회 전반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 아닐까요?

 

衣養萬物而不爲主

“(중요한 것은) 가능한 많은 대상을 입히고 키우는 방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떠한 특정 대상을 위주로 그 대상만을 위한 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앞의 문장의 연결선상에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大道 즉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대상에 (萬物) 혜택을 입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지, 특정 대상이나 과제 위주로 돌아가서는 그냥 실행방안에 그치지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내년 영업전략을 짠다고 해보죠. 여기에는 자사, 경쟁사 그리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망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 분석부터 시작하여 자사가 가지고 있는 전체 제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분석과 그 각 제품에 대해 회사 전체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되는지에 대한 의견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잘나가는 특정 제품 위주로 아니면 담당자 본인이 잘 아는 영역에 국한하여 내용이 작성된다면 그걸 회사의 전체적 운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大道 즉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이나 방안을 세우려면 어느 특정 대상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常無欲 可名於小

일상적으로 무언가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점을 찾다보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대상에 대해서도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분석하게된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노자는 큰 방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조그만 이슈들부터, 그리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기본이 되는 것들부터 名 즉 규정되어야 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常無欲이라는 문장은 이미 1장에서도 나왔던 이야기 입니다. 常無라는 것은 결국 항상 무관심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하고 내팽겨둔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냥 그런채로 혼돈의 상황에서 오랜시간 머물러있든 것들을 말하는 거죠. 이러한 대상들부터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되면 (欲) 작은 대상에 대해서도 (於小) 규정을 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 즉 Naming이 진행될 수 있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可名)   

 

조금 의미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냥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구석의 골목부터 쓰레기를 치우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다보면 동네 전체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별 것아니라고 흉물을 방치해 놓으면, 그 영향이 주변 전체에 미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이른바 깨진 유리창의 영향이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이야기가 여기에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을 넓게 돌이켜보고 어느 특정 대상이나 상황 위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가히 큰 방안을 지향한다 이야기할 수 있다.”

 

“歸”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돌아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물이 어떤 道로 돌아와 모여든다, 즉 소속된다는 해석들을 많이 보는데요. 이보다는 여기서의 歸라는 글자는 歸納法 등에서 쓰이는 의미와 같이 무언가 해답을 내기 위해 기본이 되는 현상들을 돌이켜 본다 또는 두루 고려한다 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앞의 첫 네 글자의 의미는 만물 즉 모든 경우의 수를 돌이켜 고려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요, 뒤에 이어지는 不爲主라는 말은 특정 현상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어느 특정 현상에 매몰되거나 치우지지 않고 전반적인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살피고 고려해라, 그래야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이야기겠죠. (可名爲大) 일을 함에 있어 detail을 챙기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可名於小라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놓쳤던,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세세한 것들까지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이고, 그 범위도 어느 특정 부분만이 아닌 전만적인 내용을 다 살펴야한다는 의미라면, 일을 함에 있어 굉장히 치밀해야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결국 자신을 높이려하는 것을 우선시 하지 않아야 능히 큰 도를 이룩할 수 있다.”

 

‘以其終’이라는 말은 중국어로 ‘결국에’라고 해석이 됩니다. 결국에라는 말을 쓴 것은 앞에 경계한 일을 진행함에 위주로 하지말라는 대상이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자신의 편견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무언가 진행해서는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힘들다는 것이죠. 즉 이기적인 의도를 배제하는 것이 무언가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3장

2022. 2. 18. 10:15 from BoOk/pHiLoSoPhY

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부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33장은 매우 평이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도 딱히 지도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33장은 내용을 전체적으로 한번에 해석하고 시작하겠습니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자를 지혜롭다하며,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사리에 밝다고 한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상대방을 이겨내는 사람을 힘이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는 사람은 강하다 한다. “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만족함을 아는 사람을 부유하다 하며, 강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그 기반을 잃지않는 자는 오래 가겠지만, 죽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이다.”

33장은 각 문장마다 다소 대치되는 상황을 대치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것도 좋지만 뒤의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은연 중에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문장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나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인지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이야기 한 이후, 하지만 정작 알아야할 것은 나 자신이 정말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알아야 明 즉 정말로 이치에 밝다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앞서 6시그마 이야기도 했었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있은 후에야 그에 맞는 합당한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정말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들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거죠.

두번째 문장도 비슷합니다.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금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겨내는 자가 정말로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단지 남을 꺽는 것에 힘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써야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은 서로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문장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부유하다고 하는 것은 이쯤하면 되었다라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은 어쩌면 미덕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 두문장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의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쇄신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의 굳은 의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단순히 오래가기 위해 나의 기반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위치에 있지않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면 그것이 진정한 오래감이 아닐까, 라고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합니다.

33장의 내용은
1) 나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판단하고,
2) 그 문제를 이겨내려는 방안을 마련하며,
3)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개선 추진하여야 한다
4) 또한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단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없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라고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2장

2022. 2. 16. 13:34 from BoOk/pHiLoSoPhY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상합 이강감로

民莫之令而自均

민막지령이자균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知止 可以不殆

지지 가이불태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방도가 있더라도 그 이름이 없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미미한 문제일지라도 천하는 이를 다스릴 수 없게된다.”.

 

노자의 첫장을 여기서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名은 Naming, 즉 대상을 규정하는 절차로 해석한다면, 32장의 첫 구절 ‘道常無名’, 즉 이름이 없는 방도라는 것은 여하한 이유로 채택되지 않은, 그러므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방도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간혹 ‘도는 영원하지만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멋있어 보이는 해석이긴 하지만.. 무슨 말이죠?)

 

좀 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죠. 예를 들어 차도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주변을 살피고 보행자의 판단 아래 눈치껏 건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모든 도로에 지하도나 육교를 설치하는 방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신호등을 설치하여 빨간불이 나오면 서고, 파란불이 나오면 건너가는 걸로 약속을 정할 수도 있고요. 이것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안이 10가지, 20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어느 방안을 채택할지 고민을 하게되죠. 아무튼 채택되지 않은 방안들은 모두 ‘道常無名’ 즉 규정되어지지 않은 (즉, 채택되지 않은) 방도가 되게되는 겁니다.

 

‘樸雖小’ 소박하고 비록 작은, 즉 아무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天下莫能臣也’ 세상사람들은 다스릴 수 없게됩니다. 생각해보시죠. 길 건너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방안이 없다면 이 쉬운 이슈도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게됩니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지도자가 만약 이를 (만들어내어) 지켜낸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찾아들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경우 여러 방도 중에 합당한 방도을 선택하여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군주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주변의 의견을 물리치고 현실에도 맞지않는 방도를 독단적으로 수립하여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최적의 방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조금 더 보완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萬物將自賓’ 이런 지도자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즉 모이게 된다는 말이겠고요.

 

문제가 눈 앞에 닥쳐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뭉게고 아무것도 안하는 리더들을 종종 보곤합니다.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문제를 대응하는 것이건 아니면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건, 여러 방안 중에 결국 하나의 방안을 채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리더의 몫입니다.

 

天地相合 以降甘露

천지가 서로 간에 화합하면 감로가 내리게된다.”

 

이 문장은 앞의 28장의 내용에 연결선상에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서로 알맞은 조합을 통해 개선방안을 채택하게되면, 여름철 내리는 단비와 같이 구성원들이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民莫之令而自均

사람들이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따르게 된다."

 

어떤 사회에 제도나 풍습, 관습 등도 그 구성원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도가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방도와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취지를 공감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도도 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 취지에 공감하고, 효과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방도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된다면 누가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는 것은 잠시 기다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을 누가 따로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희미해도 차를 몰면서 중앙선을 지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새로운 제도를 시작하면 이름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이름 또한 언젠가는 다함이 있다. 뭇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앞에서 새로운 대안이나 방안을 제시하는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면, 지금부터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노자는 여기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Originality를 영원히 유지시키는 제도도, 법칙도, 관습도 있지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통용되는 방안이 언젠가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끝날 것음을 경험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라도 알고 있습니다.

 

知止 可以不殆

멈출 때를 알면 가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기존의 것을 멈춘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이대로 타성에 젖어 기존의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냥 하던 데로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관습에 안주해서는 어느샌가 위기에 처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변의 국가들은 소총병으로 변모하는 시대에 장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에 안주하는 나라가 있던가고 생각해보시죠. 그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기존의 제도나 세력이 강고하게 자리 잡았더라도 변화가 눈앞에 다가왔다면 변해야합니다. 아니면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비유하자면 천하의 道라는 것은 마치 강과 바다로 흐르는 물줄기와 같아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라는 것은 계속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끝임없이 적응해야되며 나도 변화해야 합니다. 안일하게 기존 방식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만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 하며 노자는 32장을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1장

2022. 1. 18. 16:27 from BoOk/pHiLoSoPhY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부가병자, 불상지기, 물혹악지, 고유도자불처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군자거즉귀좌, 용병즉귀우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부득이이용지, 염담위상, 승이불미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이미지자, 시락살인. 부락살인자, 즉불가이득지어천하의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길사상좌, 흉사상우. 편장군거좌, 상장군거우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언이상례처지, 살인지중, 이애비읍지. 전승이상례처지
   
31장의 내용은 앞장의 내용이 이어진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은 그 폐해를 들어  선택해서는 안되는 방도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무릇 훌륭한 군병이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도구이며 의혹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안이 있는 이는 군병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첫 구절은 명확하게 군대는 대안이 있다면 사용해서는 안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 표현을 쏟아냅니다. “상스럽지 못하다 - 不祥之器”로 시작하여, "만물이 의혹을 품고 증오하는 대상이다 - 物或惡之”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故” 다른 대안이 있는 사람은 “有道者” 군병을 사용하는 선택지에는 머물지 않는다, “不處” 즉 그런 방안은 채택하지 않는다 이야기 합니다. 
 
어째서 이러는지는 앞장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봅니다. 폭력은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하는 방안으로 비춰져, 지도자에게는 매력적인 대안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그 속성상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죠.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군자는 머무름에 그 왼편을 귀히 하나, 군대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때에는 그 오른편을 귀이 한다.”
 
이 문구는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군왕이 신하들을 모아 국정을 논할 때, 그 왼편에는 문관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무관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임금이 남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던거죠. 조선시대 때 양반이라는 말이 동반 (문관)과 서반 (무관)들을 가르키는데, 위의 전통을 따른 작명법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문관은 동쪽에 배치하고 무관은 서쪽에 배치하였을까요?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쪽이며, 서쪽은 해가 지는 쪽입니다. 전쟁은 대비는 해야될 것임에 분명하나, 막상 벌어지면 국운이 저물 수도 있는 행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위의 두번째 문장은 이러한 내용을 가르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군병은 상스럽지 못한 도구이다. 군자의 도구라 할 수 없다.”
 
첫번째 문구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군자가 먼저 사용을 고려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부득이한 경우가 생겨 군병을 사용하더라도 평안하고 고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승리하였다 이를 미화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 설명할만한 내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군병을 사용하는 것은 침략을 당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야되고 이 경우에도 냉철한 판단 아래 꼭 필요한 부분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철저히 수립하여 신중히 진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또한 설사 승리하였더라도 전쟁 자체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이를 미화해서는 안된다 이야기 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 이런 노자의 생각은 현대의 지도자 그 누구도 실행하지 못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말라하였는데, 이를 따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요? 수많은 군병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끌려나가 전쟁에서 죽고나면, 국가는 그리고 지도자들은 그들의 희생을 용맹으로 포장하고, 국가를 위한 헌신으로 미화합니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지도자라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경우라면 전쟁을 억지하고 방지하며, 군대를 그 목적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전쟁을 미화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서 뜻을 얻을 수 없다.”
 
전쟁을 일삼는 군주는 살인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뜻을 얻을 수 없다합니다. 자기 자신도 결국 파멸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길한 일에는 왼편을 높이며, 흉한 일에는 오른편을 높인다. 편장군은 왼쪽에 위치하며, 상장군은 오른편에 위치한다.”
 
첫 두문구는 이미 두번째 줄에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군은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도 그 책임의 무거움을 항상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직급인 편장군은 상서로운 왼편에 위치 시키되, 고위 상장군은 오른편에 둔다 이야기 합니다.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말하자면 전쟁은 상을 치르는 예를 따라야하는 것이니, 뭇대중을 살해하였다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한다. 전쟁에 승리하였더라도 이는 상례로 처리하여야 한다.”
 
전쟁의 수많은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군과 적군 모두 희생이 발생되기 마련이고, 수많은 민간인들도 남녀노소를 가지리 않고 희생당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는 마치 우리의 앞에는 승리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리고 희생은 오로지 적국에게만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국도 상대적 약소국인 베트남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이라크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우었었고, 또 치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국이라는 이름으로 가리워진 상대국의 선량한 일반 대중들이 영문도 모른체 희생당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전쟁 승리가 환호할 만한 일일까요? 노자는 전쟁은 초상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야기 합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전쟁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야할 일이지, 미화하고 환호할 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30장

2022. 1. 13. 14:03 from BoOk/pHiLoSoPhY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이도좌인주자 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사지소처 형극생언 대군지후 필유흉년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

선자과이이 불감이취강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과이물긍 과이물벌 과이물교 과이부득이 과이물강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물장즉노 시위부도 부도조이    

   

29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복기하면 결론은 나의 선의를 혹은 나의 지향하는 바가 옳다는 독선만으로 일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 구절이 극단에 치우지지말고, 교만하지말고, 필요 이상으로 일을 키우지 말라는 말도 결국은 리더의 독선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고요.

 

30장에서는 强, 즉 독선에 치우친 리더들이 논리나 설득이 아닌 강압을 행사하여 일을 추진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자기 확인에 가득한 리더들이 종종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주변의 의견을 물리치며 질책과 폭력적 수단으로 목표한 바를 달성하려고 추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이러한 폭력적 양상은 종종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구현되고는 했고요.

 

노자는 폭력을 통한 성취는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들며, 이를 경계하라 이야기 합니다.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군주가 사람들을 돕기 위한 방도를 택한다며 군사와 같은 강압적 방식을 취해서는 안된다. 이는 결국 응당하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첫 6자는 많은 경우 “도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군주를 돕는 자는..”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 군주에 대한 이야기인데, 연결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以道佐人하려는 (도로써 사람들을 도우려는) 主者 (군주되는 사람은)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리더들은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표면적으로던 진심이던 구성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양한 선택을 하고 개선책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밀어붙이는 방식도 포함이 됩니다. 토론과 설득 그리고 협상에는 오랜 시간과 고민이 필요한 반면 강압적 방식은 일견 리더들에게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주기 십상입니다. 不以兵强天下라는 말은 고대 중국에서의 비유를 든 것이겠지만, 침략은 자국의 생산기반을 육성하는 것보다 군사를 통해 옆의 나라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 더 빠르고 쉬워 보여서 결단이라는 미명 하에 빈번히 자행되었던 방식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其事好還, 하지만 현대국가에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결국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며, 대가가 돌아옵니다.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지휘관이 머무르는 곳에 온갖 고난이 생겨나며, 대군이 지난 후에는 흉년이 반드시 발생한다.”

 

전쟁은 미래의 성장을 이끌어갈 인적기반인 젊은 청년들을 수도 없이 전장에서 희생시키며, 비록 승리로 전쟁이 마무리되어도 피를 본 상대는 복수의 기회를 노리기 마련입니다.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

“좋은 것은 (여러 옵션 중) 성과를 거두는 방도를 선택하고 (무리하게 더 이상 가는 것은) 그치는 것이다. 강압적인 방식을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취할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목표한 바를 달성하는 것이고, 그중 가장 나은 방식 (善者)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 쉬워보인다고 뒤에 발생할 부작용을 감당도 못할거면서 강압적 방식을 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성과를 이루었다고 긍지를 가질 것도, 반대파를 쳐내려할 것도 그리고 교만에 빠지지도 말아라. 성과를 이루었으면 얻는 것 없는 상황에서는 더이상 (나아가지) 말 것이며, 성과를 얻는다고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말아라.

 

첫 세문구의 내용은 결국 나를 위하여 조직의 역량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내포하는 듯 합니다. 자긍심을 가지는 것도, 나의 반대파를 이 기회를 활용하여 쳐내려는 것도, 교만에 빠지는 것도 결국은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과 무관하게 나를 돋보이기 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니까요.

 

다음 두 문구는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지를 고민할 것이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성과가 더 안날 것이 분명한데도 일을 지속하거나, 무리한 수단을 써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만물은 장성한 이후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쇠퇴한 상황에 도달하면 더 이상 사용될 수 있는 방도가 아니게 된다. 무리한 방법은 빨리 효용가치를 잃게된다.”

 

30장의 마지막 문구입니다. 생노병사는 모든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입니다. 그것은 단지 생명체에만 적용될 수 있는 원리가 아니고, 국가에도 규범에도 이론에도 그밖의 거의 모든 대상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장에서 노자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급하게 이룬 것은 급하게 잃게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지금 일순 이룩하였거나, 쟁취하였다고 생각된 모든 것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무언가를 이루면,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업들이 계속 끊임없는 혁신을 외치는 것도, 지속적인 개혁이 없으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직원들을 가혹한 환경에 몰아넣어 단기적인 성과를 올릴 수는 있습니다. 아니면 경쟁사 정보를 빼내거나 업체의 성과를 강탈하는 방식으로 성과를 한순간 성과를 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계속해서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과연 이것을 지속가능한 개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쉽게 생긴 돈은 쉽게 잃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자는 30장에서 전쟁으로 대표되는 무리한 방식보다는 기본을 충실이 하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Tony Kim :

노자도덕경 29장

2022. 1. 10. 22:26 from BoOk/pHiLoSoPhY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신기 불가위야

爲者敗之 執者失之

위자패지 집자실지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고물혹행혹수 혹허혹취 혹강혹리 혹좌혹휴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시이성인거심 거사 거태

 

29장은 그 내용의 중심을 取 즉 내 소유로 하려고 한다는 것에 두어야할 것 같습니다. 얼핏 爲 즉 어떻게 만들으려는 의도에 중점을 둘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전체적이 해석 뿐 아니라, 다음장으로의 내용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천하를 위한다며 그를 취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끝날 것으로 본다.”.

 

첫 문장은 다르게는 “장차 천하를 위하여 그를 변화시키려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爲之의 뜻을 저는 “그를 (즉 천하를) 위한다는 마음으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여기서 取天下라는 문구는 바로 해석하면 천하를 취한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권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取라는 단어에는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도 같이 포함되어 있고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조직의 Leader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리더가 되어 무언가 성과를 이루고 그를 통해 조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되어 리더의 자리에 오르게되면 변화를 통한 개선을 추진하죠.

 

하지만 치밀한 현실 분석과 판단 없이, 단순히 선의만으로 무언가를 추진하여 실패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吾見其不得已) 단순히 선의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추진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로 첫줄은 해석하였습니다.

 

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라는 신묘한 그릇은 개인이 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위의 해석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그리고 강조하기 위한 문구로 이해됩니다. 선의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선의로만 일을 추진하면 실패할 것이다, 또한 잡았던 권력조차 잃을 것이다."

 

선의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리더의 자리에서 일을 추진하기보다는 선의로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의만으로는 안된다는 표현을 단순히 위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래서는 거의 실패하고 권력조차 잃게된다는 거고요.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원래 모든 만물은 자신이 주도하다가도 다른 것을 따르기도 하고, 흐느끼다가도 휘파람을 불며 즐거워하기도 하며, 강하다가도 약해지며, 굴종하는 듯하다가도 반발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세계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사물을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가지 특성만을 가진 현상은 좀처럼 없습니다. 이를테면 대기환경을 위해 노후차량의 운행을 제한한다고 생각해보도록 하죠. (이것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는 다른 측면에서 손해보는 집단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노후차량을 보유한 그리고 여기에 생계에 대부분을 의지하는 영세상인들을 예로 들 수 있겠죠. 이러한 집단에 대한 충분한 대책도 같이 고려되어서 일이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야 본래의 취지를 달성할 수 있겠고요. 그냥 환경을 위하는 것이니 희생을 감수하라고만 한다면 반발과 비판으로 제대로 일이 진행될 수도 없고, 오히려 앞으로 이러한 좋은 취지의 정책이 다시 추진되기 어렵게 만드는 악영향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사람들은 무언가 변화가 있으면 그전의 태도를 유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저 사람은 아니면 저 집단은 내편이라는 또는 우리를 지지한다는 착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단지 지금 당신이 그 사람에게는, 그 집단의 방향이 그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지금 따르기도하고, 지지하기도 하고, 강하게 지지하기도 하고 순간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손해가 된다 생각되면 입장을 바꾸는 것이 자연스런 사물의 본질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이런 이유로 성인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현상이나, 오만함 그리고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을 피한다."

 

마지막 문구는 결국 무언가 변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 과정이 점진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합니다. 한방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유혹이 그리고 자신감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런 성급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자신에게 혼자 독주하지 말자, 나 혼자 옳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지 말자, 일 크게 벌리지 말자, 이렇게 돌아보고 돌아보며 경계해야된다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을 모두 살피고 그에 대해 예측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대응방안을 만들려면, 그리고 한정된 나에게 주어진 자원들을 생각하면 줏어담지도 못할 정도로 일을 벌려서는 안되겠죠. 독선에 빠지거나, 사람들을 무시하는 오만함에 사로잡히면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테고요.

 

결국 29장은 나만의 선의를 내세워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독선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그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Posted by Tony Kim :